Apr. 12. 2002 | 화랑가를 돌다보면 전시장에 걸린 수많은 작품 속에서 한국적인 작품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는 국내외 미술계에서 통용되는 조형언어가 영상·설치 등 특정 분야에 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장르로 구별되는 한국성이 아니라, 한국미술에 내재된 보편적 정서를 포착한다면 장르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호암갤러리에서 5월 12일까지 열리는 ‘격조와 해학전’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듯하다. 이 전시는 서구화풍과 재료가 도입된 20세기 초를 근대미술의 시발점으로 삼는 대신, 근대정신이 발아한 시기와 그 정신에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실학이 만개한 19세기 중엽부터 1960년대까지가 근대미술기로 설정됐다. 이하응, 민영익, 장승업, 김환기, 김기창, 박수근, 이중섭 등 한국근대미술 1백년사 속에서 추려낸 작품 56점 속에 담긴 정서는 ‘격조’와 ‘해학’이라는 두 단어로 수렴된다.
문인화의 격조와 민화의 해학적 정서 한 자리에
그 중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함께 작품의 사의성을 중시한 문인화는 한국미술의 격조를 대표한다. 이하응의 춘란, 조희룡의 홍매도 등도 수려하지만, 특히 민영익의 노근란(露根蘭)은 그 상징성이 강렬하다. 이는 ‘나라를 잃으면 난초의 뿌리가 묻힐 땅도 그리지 않는다’는 중국 고사에 기인해 망국의 한을 절절히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 근대 문인화에 담긴 격조 높은 사의성을 이어받은 김환기, 서세옥, 유영국 등의 작가는 절제미와 정신세계를 추구한다는 면에서 선대의 작품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
문인화의 전통에 내재된 격조가 한국근대미술의 근간을 이루는 오른편 축이라면, 그 왼편을 이루는 축은 민화 속에 담긴 해학이다. 장식적인 책거리 그림과 모란도, 기복신앙을 담은 무속화, 와유(臥遊)를 실현하고자 한 금강산도 등에 담긴 장식미와 소박미는 박생광의 현란한 무녀도, 김기창의 바보산수, 이중섭의 은지화 속에 녹아들었다.
‘취화선’ 장승업의 화조도, 이중섭의 은지화 등도 선보여
또한 이번 전시는 격조와 해학의 정서를 중계하는 중인 계층의 작품으로 ‘창의’란 측면을 내세운 점이 흥미롭다. 그 중에서도 김홍도, 안견과 함께 조선의 3대 화가로 꼽혔던 장승업은 물살을 가르는 송사리를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는 청호반새, 졸린 눈의 잠자리, 수다떠는 참새 등 동물의 미세한 표정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중인 계층 화가의 창의적 풍경 묘사를 이어받은 변관식과 이상범의 실경산수화도 주목할 만하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성인 4천원, 초·중·고생 2천원. 매일 오전 11시, 오후 2시, 4시에 전시설명회가 열리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본 관람권으로 로댕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불전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문의전화는 02-771-2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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