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15. 2002 | ‘주체로서의 남성과 대상으로서의 여성’. 서구 시각예술의 역사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위계질서다. 이 같은 관계가 위험한 것은, 그림 속에 묘사된 여성상이 단순히 미적 감상의 대상에 그치는 게 아니라 여성의 수동적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서구미술의 전통을 이식한 한국 근현대미술사 속에서 여성성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을까?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3월 6일∼6월 29일까지 개최되는 ‘또다른 미술사-여성성의 재현’전은 이런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전시명이 상징하듯 이번 전시는 여성작가가 일궈낸 절반의 미술사를 발굴해 되살리려는 의도에서 기획됐다.
상실된 절반의 미술사 되살리려는 시도
한국 근현대미술작가 63명의 작품 71점을 선보인 이번 전시는 1부 ‘여성의 이미지와 공간’, 2부‘여성적 소재와 기법’으로 나뉘었다. 1부가 근현대미술작품 속에 묘사된 여성상의 변천사를 보여주면서 남성작가와 여성작가의 시각 비교를 곁들였다면, 2부는 여성의 소일거리로 폄하돼온 수공예적 기법과 여성적 소재가 현대미술 속에서 어떤 식으로 재해석됐는지 보여준다.
예컨대 1부 전시 ‘여성의 이미지와 공간’에서 여성은 자연과 동일시되는 나체로 그려지거나, 집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정숙하게 앉아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실험실에서 일할 때도 흰 가운 속에 한복을 입고 앉아있는 여성을 그린 이유태의 작품은, 비록 공적 공간에서의 여성을 그리긴 했으나 ‘여인좌상’으로 대표되는 수동적 여성상의 잔재를 보여준다. 그러나 6·25 전쟁을 전후로 생활전선에 뛰어든 박수근의 여인상이나, 투박한 기층민 여성을 그려낸 오윤의 민중미술 등 다양한 시점을 볼 수 있다. 또 남성작가들의 작품에서 터부시됐던 임신부를 당당한 모습으로 빚어내 건강한 생명력을 설파한 한애규의 테라코타도 돋보인다.
한편 2부 전시는 작품에 도입된 기법과 소재 탐구를 통해 여성성을 고민하고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전통적인 여성 영역이었던 바느질, 수놓기, 퀼트 등의 제작기법을 응용한 작품이다. 나비 자수가 박힌 천을 꿰매 붙이고 주변에는 엉킨 곡선을 수놓아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망과 혼란스러운 내면을 표현한 하민수, 여러 장의 수제 한지에 개인적인 추억을 그려 넣고 퀼트처럼 이어 붙인 신경희 등은 그 대표적 예다.
대상으로서의 여성 아닌 관람자·작가로서의 주체성 찾기
이처럼 작가들이 수공예적 기법을 스스럼없이 차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마티에르에 대한 작가적 욕구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모적인 가사노동에만 머물렀던 여성의 일이 창작 수단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아예 작가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것도 최근 작품의 경향 중 하나인데, 공장에서 작품을 주문생산 하거나(홍승혜) 종이를 바닥에 쌓아 가변적인 미니멀리즘 조각을 만들어내는 등(김주현) 개념미술적 성향의 작품들이 이에 해당한다. 주체적 관람자로서의 여성 시각을 유도해내고, 여성작가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인 만큼, 본 전시는 남성작가와 여성작가 어느 한 편에 치중하지 않고 다양한 시각들을 고루 배치함으로써 관람자가 스스로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전시 부대행사로 6월까지 매달 2·4주 금요일 오후 3시에 박물관 시청각실에서 필름상영회가 있으며, 같은 장소에서 5월 31일 오전 9시 30분∼오후 6시까지 국제학술심포지엄 ‘한일 근·현대미술과 여성’이 개최될 예정이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오전 9시 30분∼오후 5시(일요일, 공휴일 휴관)까지다. 문의전화 02-3277-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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