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26. 2002 |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벽이 투명해진다면? 혹은 답답한 시멘트 벽 대신 유리창으로 사방을 두른 벽을 만들 수 있다면? 푸른 하늘이 시원하게 비치는 지붕은 또 얼마나 멋질까. 시멘트 상자처럼 네모반듯한 건물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도시인들이라면 한번쯤 꿈꿔 보았을법한 풍경이다. 소격동 학고재(구 아트스페이스서울)에서 5월 1일까지 개최되는 고명근의 9번째 개인전 ‘빌딩의 꿈’에서는 이렇듯 환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색적인 건물들을 접할 수 있다.
무의식의 세계를 현실로 일궈낸 사진설치조각
조각을 전공한 고명근은 뉴욕 프랫대학원 재학시절 사진에 매료되면서 사진과 조각의 경계에 서 있는 일련의 ‘사진조각’작업을 선보였다. 그의 사진조각은 건축물을 촬영한 사진을 입체구조물에 반복적으로 이어 붙이면서 원본의 이미지를 뛰어넘는 새로운 맥락으로 창출된다.
특히 이번 전시 출품작들은 촬영한 이미지를 투명필름에 인쇄하고 아크릴 구조물 위에 붙여 투과성을 살렸다. 투명한 외벽을 통해 건너편 벽의 모양과 색채가 투과되면서 중첩된 이미지는 초현실적인 느낌을 고양시킨다.
고명근의 건물은 그 투명성으로 인해 이미 주거기능을 상실했지만, 이로써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꿈을 담은 공간으로 기능한다. 건물 유리창 밖으로 넘칠 듯 찰랑대는 물과 하늘의 모습은 포토샵을 이용해 실감을 더했다. 흰 구름이 떠다니는 푸른 하늘을 외벽에 그대로 옮겨온 건물 옥상에는 손톱만한 사람 모형을 올려놓아 건물의 크기와 대비시킴으로써 멀리서 거대한 건물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강조했다.
무의식 저편에 가라앉은 꿈의 이미지와 퇴락한 주거공간의 모습이 결합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건축물들은 마치 고대 유적지의 풍경인양 고풍스럽다. 그러나 고명근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건물들은 고궁 등 일부 건물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상생활 속에서 채집된 이미지다. 이는 낡고 지저분하다는 이유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사물들에 대한 작가의 애착에서 기인한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
예를 들어 ‘피사의 사탑’을 닮은 건물은 유적지에서 촬영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유학시절 자주 지나쳤던 브루클린 빈민가에서 찍은 평범한 벽 사진을 모자이크처럼 반복적으로 이어 붙여 만든 것이다. 또한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암울한 느낌의 원탑형 건물은 봉천동 재개발구역에서 인상깊게 보았던 낡은 담벼락 사진을 활용했다. 그의 사진조각을 보고 있으면 먼지 쌓인 환풍기의 날개, 유치한 낙서들로 도배된 잿빛 담벼락, 녹슬고 허술한 방범창 등 어릴 때 살던 동네 뒷골목에서 본 듯한 익숙한 풍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고명근은 “개발논리에 묻혀 사라지는 주변의 건축물을 보면서 안타까웠다”며 “보잘것없는 대상으로 여겼던 것도 관심을 가지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제작 의도를 밝혔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이며, 자세한 문의는 02-720-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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