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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묵은 때를 벗기듯 속시원한 소통의 장 - 나의 아름다운 빨래방전

by 야옹서가 2002. 6. 5.

 Jul. 05. 2002
| 관훈동 한 골목어귀에 위치한 지하전시장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 안에 무료 빨래방이 들어섰다. 내부에는 최신형 드럼세탁기 2대, 빨래바구니, 때가 쏙∼ 빠진다는 ‘비트’, 표백제와 섬유린스, 심지어 다림판과 다리미까지 구비됐다. 비록 합판으로 사방을 두르고 창에는 블라인드를 친 빨래방 외관은 공사장 간이숙소처럼 황량하지만 말이다.

작가 오인환(38)이 7월 12일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나의 아름다운 빨래방, 사루비아’에서는 무료세탁을 해주는 대신, 아무나 손님으로 받지 않는다. 참여자격은 대한민국 성인 남성에게만 주어지며, 사전에 세탁희망일자를 적은 참여신청서를 작성해 빨래방에 제출해야한다.

주문이 까다로운 남성전용 빨래방
일단 선정이 되더라도 통과절차는 아직 남아있다. 참여자는 세탁이 끝나는 1시간 30여분간 밀폐된 빨래방 안에서 작가와 단둘이 머물러야 한다. 게다가 자신이 가져온 빨랫감이 아니라, 현재 입고있는 옷을 벗어서만 세탁을 의뢰할 수 있다. 작가는 빨래와 다림질을 해주는 대신, 세탁을 끝낸 옷을 촬영해 전시할 권리를 갖는다.

 첫 대면한 두 남자가 밀폐된 공간 안에서 단둘이 있는 것도 머쓱한데, 입고있는 옷을 벗어야 한다니 몇 명이나 적극적으로 호응했을까 싶지만, 전시된 사진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드레스셔츠, 청바지 등 평범한 복장부터 군복, 먹물옷, 아르마니 로고를 새긴 팬티, 앙증맞은 분홍팬티까지 주인의 성향을 보여주는 옷들이 다채롭다.

‘서울에서 남자가 남자를 만날 수 있는 90개의 장소’(2001) 등 공간분석과 게이로서의 정체성 탐구를 연계한 작업을 선보였던 오인환은, 이번 전시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소통하는 순간을 추구했다. 다양한 종류의 세탁물들은 사람들간의 ‘다름’을 증거하는 동시에, 소통을 위한 매개체로 기능한다.

대화 속에 다채로운 관점이 교차하는 공간
작가와 관람자는 세탁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에서 성인 남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삶에 대해, 일반인과 예술가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 공간제약은 작가와 관람자를 밀착시키는 물리적 조건이 된다. 한편, 관람자가 옷을 벗는 전제조건은 한편으론 머쓱하지만, 목욕탕에서 사람들이 속내를 쉽사리 털어놓듯 소탈한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동성애자이자 소외계층인 남성들을 다룬 영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에서 유색인 오마르와 백인 자니가 세탁소를 중심으로 서로 대립하고 화해했던 것처럼, 오인환의 빨래방 작업은 동시대 한국남성들의 서로 다른 사회문화적 관점을 조심스레 충돌시키는 흥미진진한 공간실험이다.

이번 전시에서 여성은 아쉽게도 빨래방에 들어갈 수 없지만, 빨래방 외관과 사진 관람은 남녀구별 없이 가능하다. 관람료는 무료. 문의전화 02-733-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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