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8. 2002 | 어둠 속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허공에 위태롭게 매달린 중년사내의 알몸이 관람자를 맞는다. 표정 없는 얼굴로 관람객을 응시하는 사내의 몸에는 손과 발이 없다. 누렇게 뜬 피부는 세파에 찌든 모습을 상징하듯 거칠게 채색됐다. 게다가 머리는 가분수라 불러도 좋을 만큼 불안정하게 크다. 이 사내는 올해로 8번째 개인전을 여는 조각가 이종빈(48)의 자소상이다.
소격동 금산갤러리에서 7월 3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이종빈이 20여 년 간 지속해온 조각작업과 지난 삶에 대한 성찰로 요약된다. 이종빈이 스스로 묘사한 자신은 불안하고 위태로운 내면과 강한 자의식이 공존하는 사람이다. ‘수영하는 사람 Ⅰ, Ⅱ’(2002)에서는 아예 망망대해 위에서 의지할 대상 하나 없이 떠도는 사내로 묘사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물밑으로 자신을 이끄는 힘에 대항하는 사내의 결연한 모습은 수영이 아니라 삶과 투쟁하는 듯하다.
삶의 막막함과 투쟁하는 치열한 자의식
손발이 잘려나갔거나, 물 속에 잠겨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신체로 묘사된 이종빈의 자소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머리에 대한 집착이다. 머리는 사고기능의 핵인 동시에 자의식의 저장고라는 점에서, 그리고 자전적인 성격을 띤 그의 작품이 성장기의 기억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강조된다. 작가의 아버지는 월남한 실향민으로, 남한에서 재혼한 뒤에도 북의 가족을 그리며 새로운 가족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남겼는데, 이는 작가가 내면세계에 침잠하게끔 하는 동기가 됐다.
자전적 작품의 대표적인 예는 그의 첫 영상설치조각인 ‘나는 아버지를 본다’(2002)다. 몸은 없이 얼굴만 2미터에 달하는 기념비적 크기로 재현된 조각상의 두 눈 부분에는 그의 아버지가 평생 돌아가길 원했던 북녘 땅의 영상이 비친다. 이종빈이 만든 조각은 아버지의 얼굴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다. 작가와 그의 아버지는 실향민 가족으로서 겪는 내적 상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작고한 아버지의 눈 속에 북녘 땅의 영상을 영구 이식함으로써 상징적인 화해를 이루면서 성장기의 상처를 내적으로 승화시켰다.
구작과 신작 사이를 잇는 기억의 가계도
자전적 신작을 선보이는 한편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결산하는 ‘아트 맵’(2002)도 선보여 눈길을 끈다. 마치 나무뿌리처럼 하위단계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마인드 맵’에서 착안한 이 작품은 자신의 시기별 대표작 1백여 점을 새로 만든 것이다. 홍익대 대학원 졸업 후부터 경기 양평 작업실에 자리잡기까지 20여 년 간 제작해온 작품들이 10cm 전후의 앙증맞은 미니어처로 재연됐다. 신체 일부를 강조한 초기 조각부터, 회사원, 카바레 악사, 댄서 등 주변부 사람들을 그린 중반기의 채색조각, 단순화된 형태로 명상적 세계를 그린 근작, 이번 전시에 소개한 자전적 조각까지 아우르는 작품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도약을 위해서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한 법이다. 작가가 어느 시점에서 고백하듯 자전적 작품을 제작하고, 가계도를 그리듯 지난 작품들을 되새김질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외관상 그의 자소상은 위태로워 보이지만, 그 얼굴이 초라하지 않고 당당한 건 자기검증을 거쳐 확인한 내면의 힘을 작가 스스로 보았기 때문이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다. 문의전화는 02-735-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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