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26. 2002 | 나뭇가지에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책, 얇은 철판으로 만든 책 위에 자석글자를 자유롭게 뗐다 붙었다 할 수 있는 책, 한때 체벌도구로도 사용됐던 학생부 모양을 한 전시도록…책인지 예술작품인지 모를 기발한 디자인이 눈길을 끈다. 바로 환기미술관 별관 2층에서 8월 25일까지 열리는 ‘Livre Object : 감상하는 책’전에서 접할 수 있는 풍경이다.
북 프로듀서 이나미가 운영하는 ‘스튜디오 바프’와 북아티스트 김나래가 참여한 이번 전시에서는 예술제본장정, 오브제에 가까운 아트북, 전자책의 일종인 웹북 등 40여 점이 전시된다. 전시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오브제로서의 책’이 주종을 이룬다. 이들에게 있어 책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책은 일종의 조형작품으로서 보고, 어루만지고, 소리를 듣는 공감각적 지각을 통해 내밀한 정서를 환기시키는 매개체이다.
텍스트와 디자인이 유기적 관계를 갖는 북아트
이중 스튜디오 바프의 《일곱 성냥개비의 꿈》(1999)은 책의 내용과 디자인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북아트의 한 예다. 일곱 개비의 성냥들이 겪는 모험을 짧은 동화로 그린 이 책의 뒷날개에는 실물 성냥 이 꽂혀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명함만한 크기에다 10쪽에 불과한 꼬마책이지만, 내용과 형식이 일치되면서 덩치 큰 하드커버 동화책보다 강한 설득력을 보여준다.
스튜디오 바프가 제작한 또다른 책으로 돋보이는 것은 예술가들의 전시도록이다. 예컨대 퍼포먼스작가 이윰이 자신의 첫 개인전을 위해 의뢰한 도록 《빨간 블라우스》(1994)는 여성복의 앞가슴섶을 열듯 빨간 리본을 풀고 책 날개를 좌우로 펼치는 도발적인 디자인으로 화제가 됐다. 이밖에도 여권의 모양을 그대로 본딴 이성동 사진집, 도록을 제본하지 않고 전개도 형식의 상자에 넣어 집 →방 →서랍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흐름을 강조한 정은정 사진집 등이 눈길을 끌었다.
오래된 필름처럼, 추억을 형상화한 독특한 장정들
한편 북아티스트 김나래의 작업은 스튜디오 바프와는 그 성격이 좀 다르다. 스튜디오 바프를 ‘상업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시각디자인의 실험가’에 비유한다면, 김나래씨의 작업들은 소소한 추억 속에 가라앉은 내밀한 정서를 환기시키는 ‘언어보다 느낌으로 표현하는 내향적 예술가’에 가깝다. 디자이너와 순수예술가로서의 두 측면을 저울에 단다면, 김나래의 책은 예술작품으로서의 오브제 쪽으로 좀 더 기운다.
예를 들어 《화투북》(1998)은 화투를 너무 좋아해 앉은자리를 뜨지 않고 화장실 가는 것도 참다가 방광암에 걸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추억에서 유래됐다. 타인의 의뢰를 받아 책을 제작하는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추억의 형상화다. 부모님의 결혼2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변호사 원용복씨의 두 딸이 의뢰한 결혼 20주년 기념 아트북의 경우, 부부의 학창시절 빛 바랜 사진부터 연애편지, 결혼사진, 삐뚤삐뚤한 글씨로 써내려 간 딸의 어렸을 적 편지 등 잊지 못할 순간들을 한 권의 책에 집약하면서 따뜻한 가족애를 보여준다.
이밖에도 가죽과 금박으로 장식한 하드커버 장정에 마블링으로 문양을 넣은 속표지가 화려한 김나래의 예술제본장정, 스튜디오 바프가 디자인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영상집 등 다채로운 자료들을 볼 수 있다.
관람료 일반 2천원, 학생 1천원. 부대행사로 매주 토·일 오후 2시, 4시에 본관 1층에서 북아트 관련 비디오를 상영한다. 문의전화 02-391-77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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