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13. 2002 | 꽃의 여왕으로 불리는 장미. 검붉은 드레스를 걸친 요부처럼, 때로는 순백의 신부처럼, 때론 달콤한 분홍빛 꿈을 꾸는 소녀처럼, 그 빛깔과 모양에 따라 풍기는 이미지는 천차만별이다. 인사동 갤러리상에서 9월 29일까지 열리는 ‘The Rose’전은 이처럼 다채로운 장미의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한 전시다.
가국현, 구자동, 김용중, 김재학, 박성열, 이동숙, 이정웅 등 서양화가 23명의 작품 총 60여 점이 전시된다. 장미 그림이라면 대개 다소곳한 정물화를 연상하기 쉽지만, 정물화는 물론 풍경화로서의 장미, 장미와 함께 있는 인물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했다. 구상회화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운데, 장미의 이미지만을 추출해 추상화한 작품, 구상과 추상을 결합한 작품 등 다양한 조형언어를 사용한 작품도 눈길을 끈다.
한 송이 꽃에 실어보내는 순수함과 정열
예컨대 박철환의 구상회화 ‘장미’(2002)는 수채화의 투명한 맛을 살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흰장미를 사실적으로 포착한 경우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한 줄기 빛을 받으며 붉은 꽃심 부분을 수줍게 벌려 내보이는 장미꽃 봉오리는 섬세하게 묘사하고, 그 장미를 떠받치고 있는 잎과 줄기는 간략하게 처리해 장미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했다.
한편 박영근의 ‘The Rose’(2002)는 밤에 피는 장미를 연상시킬 만큼 은밀하면서도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녀 앞의 작품과 대조를 이룬다. 적색과 초록색으로 밑칠을 하고 건조시킨 후에 검은색 물감을 덧바르고, 이를 나이프로 자유롭게 긁어내는 방식으로 장미꽃의 흔적을 묘사한 이 작품은, 얼핏 보기엔 검은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태양이나 암흑 속을 휘젓는 빛의 소용돌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천천히 들여다보면 여러 송이의 장미꽃들이 방사형을 이루며 또다시 하나의 거대한 꽃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장미의 숨겨진 격정과 정열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요부에서 숙녀까지, 장미의 다양한 모습 그려
이밖에도 엄밀히 말하면 장미는 아니지만, 장미처럼 겹겹이 펼쳐지는 잎을 지닌 선인장을 그린 이동숙의 ‘장미선인장’(2002)도 특이한 작품이다. 선인장의 두텁고 물기 많은 잎의 느낌이 짙은 초록색부터 옅은 연두색까지 서서히 변화하는 색조 속에 담겼다. 장미선인장이라는 소재가 유화물감의 둔중한 느낌과 어우러지면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초록색 장미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갤러리상 신혜영 큐레이터는 “흔히 장미의 계절은 5월로 알려져 있지만, 한해에 두 번 개화하는 장미의 두 번째 계절은 가을”이라고 설명하고 “전시작품들을 10호 내외의 소품들로 구성해 구입을 원하는 사람들이 작품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소장할 수 있도록 했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다. 추석연휴(20∼22일) 휴관. 자세한 문의전화는 02-730-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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