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06. 2002 | “금반지에는 구멍이 있다. 이 구멍은 금과 마찬가지로 금반지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다. 금이 없다면 구멍은 반지가 아니다. 그러나 구멍이 없다면 금 또한 반지일 수 없다. ”
앞서 언급한 헤겔철학자 코제브의 비유처럼, 존재와 부재가 동전의 이면처럼 한 쌍을 이루는 순간은 도처에 존재한다. 대안공간루프에서 9월 27일까지 열리는 설치작가 홍영인의 3번째 개인전 ‘The Pillars’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객체로서 존재하는 커튼을 작품의 주체로 등장시킨 작업을 해온 홍영인은, 이번 전시에서 기둥을 매개로 존재와 부재의 공존을 탐구한다.
일단 홍영인이 구성한 전시공간에 들어선 관람자는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응당 있어야 할 ‘작품’들은 온데간데없고, 전시제목처럼 기둥들만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존재하는 여러 갤러리 안의 기둥을 실측하고 이를 본따 만든 기둥들은, 그 모양이나 크기가 제각각인 탓에 그 안에서 어떤 규칙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커튼에서 기둥으로
특유의 주름과 양감을 지니지만 평면적이었던 커튼의 흔적은, 기둥과 같은 입방체의 형태로 전이되면서 보다 강한 존재감을 갖는다. 게다가 로코코풍 드레스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주름이 잡힌 기둥들은, 그 엉뚱함만큼이나 유혹적이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섬세하게 주름진 결을 따라 반사되는 광택 역시 관람자의 접촉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물결처럼 주름진 기둥의 표면은 외관상 육중하고 견고해 보이지만, 관람자가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껴 기둥을 슬쩍 손으로 눌러보면, 실제로는 그 속이 텅 비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있어야 할 것들이 제 자리에 없을 때, 혹은 없어야 할 것들이 전혀 의외의 공간에서 등장할 때 시각적 충격을 경험하게 되는데, 홍영인이 노린 것 역시 이런 부분이다.
존재와 부재-모순되는 두 현상이 공존하는 순간
응당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작품이 부재하고, 엉뚱한 기둥들이 두 줄로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이 첫 번째 반전이라면, 견고하고 무거워 보였던 기둥이 실은 텅 빈 존재라는 사실은 두 번째 반전이다. 금속성을 띤 은빛 공단을 기둥의 재료로 선택한 것 역시 이 반전에 힘을 실어준다.
이 두 번의 반전 속에서 홍영인은 갤러리의 기둥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의미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공간에 대한 각성을 설파한다. 이 각성은 관람자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작가는 견고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드러운, 텅빈 기둥처럼 복합적인 대상을 다루면서 모순되는 두 현상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관람자를 이끌어들인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다. 자세한 문의는 02-3141-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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