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23. 2002 | 한 자루의 부채로 할 수 있는 일에는 뭐가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 정도의 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태원에 위치한 화정박물관을 찾아가 보자. 9월 29일까지 열리는 ‘유럽과 동아시아 부채’전에서 제의적 도구, 얼굴 가리개, 연애의 매개체, 심지어는 광고 매체로까지 사용됐던 부채의 여러 얼굴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된 부채들은 한빛문화재단 소장품 3백여 점 및 한광호 재단이사장의 개인소장품 8백여 점 중 2백여 점을 선별해 소개했다. 화려함이 돋보이는 유럽의 채색접선을 비롯해 중국의 단선과 브리제 부채, 단아한 한국의 접선, 기교를 한껏 자랑하는 일본의 부채 등 세계 부채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흔히 부채의 재료라면 종이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세계 각국의 부채를 모은 만큼 부채 면과 부챗살의 재료도 다양하기 그지없다.
중국·유럽 등 서로 다른 문화간의 매개체가 된 부채
르네상스 이후부터 여성의 필수 액세서리로 애용됐던 부채문화가 전환점을 맞은 것은 16세기 중국의 접선(摺扇)이 유럽에 유입되면서부터다. 이후 후기 바로크·로코코 양식에 동양풍이 결합된 시누아즈리(Chinoiserie) 양식, 중국 특유의 브리제 부채 등이 상호영향을 미치면서 부채의 장식적 측면은 크게 진보했다. 17∼18세기 유럽 부채는 투각, 부조, 도금, 칠보, 금·은상감 등으로 부채살과 갓대를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19세기에는 석판인쇄로 부채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20세기에는 광고용 부채가 등장하는 등 시대변천에 따라 달라지는 제작기법과 재료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색다른 점은 17∼18세기 유럽에서 미리 정한 부채암호로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일종의 ‘부채 언어’가 유행했다는 점이다. 부채를 떨어뜨려 상대에게 따라오라고 암시하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런던과 파리에 부채 언어를 가르치는 특별아카데미가 설립되기도 했다. 예컨대 왼손으로 부채를 만지작거리는 건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어요’, 부채를 접어서 상대에게 내미는 건 ‘저를 사랑하세요?’, 오른손으로 부채를 만지작거리는 건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등 다양한 부채언어가 등장했다.
부채문화 발달로 ‘부채언어’까지 생겨나
한편 일찍이 부채문화가 발달했던 중국에서는 화려한 원색과 중국 특유의 풍물이 돋보이는 채색풍속화 접선, 그리고 상아에 섬세하게 조각한 브리제 부채 등이 대표작품으로 손꼽힌다. 특히 중국의 간책(簡冊)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는 브리제 부채는, 부챗살 한 장 한 장이 고운 레이스를 연상시킬만큼 정교함이 뛰어나다. 이밖에도 한국의 접선(摺扇)과 파초선(芭蕉扇), 태극선(太極扇), 효자선(孝子扇), 일본의 채색접선 등 다양한 세계 부채들을 비교 감상할 수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5시까지(월요일 휴관), 입장료는 무료다. 매일 오후 2시에는 도슨트의 작품 설명 시간도 마련된다. 자세한 문의는 02-798-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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