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23. 2002 | 화려한 분홍빛 인조모피로 사방을 도배한 공간에 수많은 풍선들이 매달려 있다. 깜짝파티의 주인공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빈방처럼 달콤한 기대와 흥분이 교차하지만, 이 방의 공기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발밑을 보면 부드러운 털가죽 사이로 예리한 쇠못들이 비집고 올라오기 때문이다.
마치 ‘달콤한 삶의 환상 속에는 깜짝 놀랄 비수가 숨겨져 있다’고 경고하는 듯한 분홍빛 방은 팔판동 갤러리인에서 8월 29일까지 열리는 변선영의 ‘h project’전 중 일부다. ‘h’는 home과 house의 약자. 집과 가정을 주제로 작업해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설치작품 1점 및 드로잉 1백 점 등을 선보였다.
핑크빛 환상 뒤에 가려진 삶의 날카로운 비수
흔히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 속에서 구현되는 ‘가정’의 이미지는 가족에게 어떤 상황이 닥친다해도 적대적이지 않은, 최후의 보루를 상징한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같은 ‘Home Sweet Home’의 가사처럼, 집은 조건없는 안식처, 혹은 어머니의 품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런 가정에 대한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족 구성원들이 겪는 갈등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변선영은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반복해서 다루면서, 갈등하는 자아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핑크빛 환상과 현실의 중압감이 공존하는 그의 집은 평안과 불안 사이, 그 어느 지점에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왕복운동한다.
설치작업에 등장하는 재료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냥 부드럽고 따뜻하게 보이는 분홍빛 인조모피도 환상을 극대화하기 위한 복제품일 뿐이며, 파티를 연상시키는 분홍 풍선도 쉽사리 터질 수 있는 유약한 존재다. 허공을 향해 예리한 날을 벼르는 침봉은, 이상향과 같은 집의 환상이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듯하다.
‘집’이 상징하는 제약 벗고 독자적인 나로 살아기기
이러한 작가의 생각이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된 것은 1백 점에 달하는 드로잉들이다. 오밀조밀한 크기의 드로잉들은 거대담론이 아닌, 가족의 일원이자 한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일기처럼 오밀조밀하게 서술한다. 때로 달콤한 환상 속을 부유하고, 때로 황무지 같은 현실에 절망하는 작가의 내면이 도식적인 집의 형상과 섬세한 드로잉으로 표출됐다.
그 안에 담긴 사연들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변선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로 요약된다. 가정은 신성불가침 영역이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것. 가정이라는 추상적 개념 속에 뭉뚱그려진 존재가 아니라, ‘갈등하고 욕망하는 독립적 개인으로서의 나’라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은 치열하다.
미술평론가 박신의는 전시서문에서 “‘Home Sweet Home’의 상징적 의미를 무산시키는 일에서 그의 작업이 출발한다”며 변선영 작품의 의의를 설명했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이며 관람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공휴일은 6시 30분)까지다. 문의전화 02-732-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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