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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물방울에 담긴 삼라만상을 들여다본다-김창열전

by 야옹서가 2002. 9. 6.

Sep. 06. 2002
| 청담동 박영덕화랑에서 9월 11일까지 서양화가 김창열의 74번째 개인전이 열린다. 1972년 파리의 살롱 드 메에서 처음으로 물방울 그림을 선보인 이래, 30여 년 간 ‘물방울 화가’로 불릴 만큼 집요하게 물방울을 그려온 김창열은 본 전시에서 대표작인 ‘회귀’ 연작을 비롯한 2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크게 3기로 나뉘는 김창열 물방울 그림의 진수가 집약됐다. 1970∼80년대에 주로 선보인, 밑칠을 생략한 거친 마포 위에 영롱한 물방울을 그려 이질적인 질감을 극적으로 대비시킨 작품이 1기라면, 1990년대 들어 천자문을 패턴으로 깔고 그 위에 물방울을 올려 전통과의 접목을 추구한 ‘회귀’ 연작은 2기에 속한다.

유한한 존재에 대한 성찰 물방울에 담아
표현기법의 변천도 눈에 띈다. 에어브러쉬를 사용해 극사실적인 표현을 추구했던 초기작과 달리, 멀리서 보면 화폭에서 굴러 떨어질 듯한 물방울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툭툭 힘있게 찍어낸 점과 선이 두드러진다.

김창열이 그림의 바탕으로 선택한 거친 마직 캔버스는 먼 과거로부터 지금의 모습을 고스란히 가져온 듯,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고적한 풍경을 연상시킨다. 반면 그 위에 살며시 얹힌 물방울은 생명의 가장 근원적인 모습인 동시에 언제 소멸될지 모를 유약한 존재를 상징한다. 그의 ‘물방울 그림’은 이처럼 서로 다른 물성을 대비시킴으로써 유한한 존재에 대한 성찰로 관람자를 이끈다.

또한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로 물방울 그림자를 꼽을 수 있다. 수많은 물방울 아래 맺힌 그림자는 화폭에 붙박인 물방울에 입체감과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화면 속의 정적을 교묘히 깨뜨린다.

이 그림자는 단순히 흑과 백의 명암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피처럼 들끓는 붉은빛부터 타오르는 태양의 노란빛까지, 살아있는 불꽃이 지닌 다채로운 빛의 스펙트럼을 한 줄기 그림자 안에 담아 마치 혜성의 궤적을 연상케 한다. 물방울의 정점에 찍힌 빛의 흔적과 그 아래 타오르는 그림자-이렇게 물과 불의 결합이 이뤄지는 찰나, 김창열의 물방울은 미시적 세계에서 우주와 같은 광활한 공간으로 확장된다.

물의 투명함처럼,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과정
 반면 3기로 분류되는 최근의 ‘회귀’ 신작들은 기존 작업과 상당히 다르다. 물방울을 다루는 것은 여전하지만, 마 캔버스의 거친 느낌을 버리고 캔버스 전면을 유화물감으로 매끈하게 덮어 물방울을 올렸다. 물방울에 생동감을 부여했던 그림자도 평면적이고 단순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같은 작가의 그림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물의 투명함처럼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보다 단순한 형태로 회귀하는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일까. 이번 전시가 끝난 후 2004년 1월부터 두 달 동안 파리 죄드폼 미술관에서 열릴 김창열의 대규모 개인전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 자세한 문의는 02-544-8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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