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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비누로 빚어만든 고전조각의 패러디-‘Translation’전

by 야옹서가 2002. 9. 27.

Sep. 27. 2002
| 신문로에 위치한 성곡미술관 별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강렬한 향기가 엄습한다. 자극적인 듯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친근하고 익숙한 이 냄새, 혹시 방향제라도 뿌린 걸까. 그러나 어둠 속에 조명을 받고 서서 관람자를 기다리는 인체조각상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된다면, ‘아, 그 냄새!’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대리석처럼 생겼지만, 모든 작품들은 비누로 제작됐다.

완벽하게 이상화된 인체에 반기를 든 모각(模刻)의 모각
조각가 신미경은 성곡미술관에서 9월 29일까지 열리는 네 번째 개인전‘Translation’전에서 쉽게 녹아 없어지는 재료인 비누를 사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 고대 그리스의 인체조각을 모사하거나, 고대조각의 포즈를 차용한 자신의 몸을 라이프캐스팅하는 등, 고전조각의 맥락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그리스 조각처럼 완벽하다”는 표현도 있듯, 고대 그리스 조각은 이상화된 인체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 조각들의 원본은 현존하는 것이 거의 없고 이를 모각해 만든 로마시대의 인체조각이 박물관에 보존되어있을 뿐이다. 신미경은 대리석에서 비누로 재료를 바꾸어 이를 또다시 모각하면서 ‘모각(模刻)의 모각’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반영했다. 대리석이 영구히 변치 않는 이상으로서의 인간을 추구하는 소재라면, 연약하고 파손되기 쉬운 비누는 상처 입기 쉬운 인간의 내면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소멸하기 쉬운 비누로 인간다움 그려낸 작업
 예컨대 신미경은 ‘Translation-Aphrodite of praxiteles, copy’(2002)에서 기원전 4세기경 조각의 거장 프락시텔레스가 창조해 낸 아프로디테를 비누로 모각했다. 단, 똑같이 모각하는 것이 아니라 포즈만 빌려오고, 작가 자신의 몸을 라이프캐스팅하는 방법으로 조각했다는 점이 다르다. 로마시대의 모각상이 ‘의미는 정확하지만 읽는 맛은 떨어지는 직역’이라면, 신미경의 비누조각들은 ‘감칠맛 나는 의역’에 견줄 만하다.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된 아프로디테 모각은 이상화된 인체의 균제미를 보여준다. 대리석이라는 견고한 재료는 그 완벽함에 빛을 더한다. 그러나 프락시텔레스의 날렵한 팔등신 미인에 비하면, 신미경의 비누조각은 영락없이 사우나실 문을 열고 걸어나오는 아줌마 같다. 뜨끈뜨끈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여성의 몸은 옆구리 살이 3겹이 될 만큼 군살이 붙은 데다, 어딘지 모르게 머쓱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엉거주춤하고 쓸쓸한 모습의 조각 속에는 프락시텔레스의 완벽한 조각에서 누락된 하나의 요소, ‘인간다움’이 담겨있다.

1층에는 고대조각이 지닌 역사성과 현장성이 미술관으로 옮겨질 때의 공간적 평행이동을 경험할 수 있도록 고대조각을 실물 그대로 모각하고, 2층에는 고대조각의 포즈만을 흉내낸 작가의 라이프캐스팅을 설치하는 등 성격을 조금씩 달리한 것도 흥미롭다. 3층에는 미술대학 학생들이 전시장에서 비누로 줄리앙을 모각한 퍼포먼스 결과물도 볼 수 있다.

관람료 성인 2천원, 학생 1천원.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월요일 휴관) 문의전화 02-737-7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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