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27. 2002 | 사람은 살아온 연륜만큼 마음 속에 길을 다져놓기 마련이다. 그 길은 물리적인 것일 수도, 은유로서의 길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처럼 어떤 순간의 갈림길, 혹은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다 쓸쓸히 돌아서던 골목길, 혹은 어릴 적 어머니 손을 붙들고 종종걸음치던 재래시장의 미로같은 길…형태와 빛깔은 다르지만 길의 이미지는, 그 길의 기억을 소유한 이의 마음 속에 끈끈하게 달라붙는다.
서울과 베를린 사이-이방인으로서의 체험을 약도 위에 새기다
관훈동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에서 10월 20일까지 열리는 ‘My favorite way’전은 서로 다른 문화적 성장배경을 가진 성민화와 요하킴 바인홀트, 두 작가가 보여주는 길에서부터 시작된다. 독일에서 작품활동을 해온 두 작가는 서울과 베를린 등 상대방의 모국에서 체험한 길에 대한 단상을 선보였다.
전시를 보기 위해선 지하계단을 내려와 신발을 벗고 전시장 바닥에 마련된 미로를 밟아나가야 한다. 전시장 바닥에 깔린 흰색과 흑색의 바닥재는 익숙치 않은 타국생활을 경험한 두 작가의 체험을 재연한다.
같은 주제로 공동작업을 했지만 두 사람의 작업성향은 차이가 있다. 성민화의 작업방식을 수필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요하킴 바인홀트의 작품은 설명문에 가깝다. 예컨대 성민화가 그린 길은 약도인지 에스키스인지 모를 만큼 자유분방하다. 깃발처럼 나무막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의 약도들은 내적 경험의 창고다. 스케치북, 기름종이, 얇게 켠 나무조각 등 다양한 재료 위에 그가 걸어온 곳의 인상, 아끼는 펜의 죽음, 상상 속의 공간 등이 소소하게 펼쳐진다.
반면 요하킴 바인홀트의 작업은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기록적 성격을 띤다. 전시 준비를 위해 40여일 간 한국에서 머물면서 지나쳤던 곳을 일기처럼 날짜별로 노트에 기록하고, 약도 형식으로 작업했다. 그린 약도는 네모반듯한 유리상자에 담아 날짜별로 넘겨볼 수 있게 한 설치방법도 자유분방한 성민화의 방법과는 차이를 보인다.
관람자의 원격참여가 가능한 월드와이드 프로젝트
이들의 작업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전시장 한쪽 구석에 ‘다락방’처럼 마련된 참여전시 코너다. 일반인이 본 전시에 참여하려면, 추억 속의 길, 상상 속의 길, 일상 속의 길 등을 약도로 그리거나, 혹은 그림으로 그려 팩스(02-733-0770)로 보내면 된다. 한국 전역은 물론, 전시 소식을 듣고 세계 각지에서 팩스를 보내온 사람들의 길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마인드 맵핑에 관심이 있거나, 스기우라 고헤이의 책 《형태의 탄생》 중 ‘인생 지도’ 편을 주의 깊게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본 전시를 좀 더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을 듯하다. 부대행사로 10월 17일 오후 4시에 갤러리 내에서 작가와의 대화 시간도 마련된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 자세한 문의는 02-733-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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