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18. 2002 | 그림자 사나이 하나가 탈출구를 찾아 달린다. 그의 눈앞에 낯익은 계단이 보인다. 아까부터 계속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맴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달리다가 문을 발견하고 열어보지만, 문 뒤에는 또 다른 문만 보일 뿐 달아날 공간이 없다. 그 문 뒤에는 또 다른 문, ‘이번만은…’ 하며 마지막으로 열어제낀 문 뒤에는 차가운 벽이 절망적으로 그림자의 눈앞을 가로막는다.
10월 26일까지 갤러리보다에서 열리는 이명진의 첫 번째 개인전‘relationship’은 이처럼 거대한 밀실과 승산 없는 싸움을 하는 그림자 사나이를 떠올리게끔 한다. 알록달록한 색채와 앙증맞은 형태로 집을 치장하긴 했지만, 탈출구를 찾아 복도와 계단을 끝없이 헤매는 저 검은 영혼의 이미지는 달콤한 환상을 모조리 날려버린다.
벽과 계단, 복도 사이에 부비트랩처럼 마련된 은밀한 통로
이명진이 만들어낸 구조물은 칼 융이 분석심리학적 통찰을 얻었던 집의 꿈처럼, 서서히 의식의 심층을 향해 다가간다. 공개해도 무방한 기억, 혹은 안전한 형태로 윤색된 추억들이 유령처럼 하얀 실루엣으로 화판의 전면에 드러나는 반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그림자 사나이와 함께 벽 속에 갇힌다. 부비트랩처럼 마련된 수많은 벽과 문, 계단은 다른 차원의 현실로 이동하는 비밀통로로 기능한다.
작가는 관람자에게 자신의 속내를 열어 보이기를 거부하면서, 한편으로는 남김없이 말하고 싶어하는 이중의 욕망에 사로잡혀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과 계단의 형태가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 두 가지 요소의 공통점을 하나만 들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도 ‘모순의 병존’이 아닐까. 문은 개방과 폐쇄, 입구와 출구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며, 계단 역시 상승과 하강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개방과 폐쇄, 입구와 출구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공간
자신의 작업을 ‘집짓기’라고 설명하는 이명진은 직접 목공 일을 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원자재를 톱질하고 못을 박고 사포질하는 과정 자체는 파괴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상징적인 행위지만, 1차적 재료의 파괴를 통해 의미있는 분절체를 만들고, 이 분절된 형태를 임의로 조합해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제작상의 설정 역시 작가가 매료된 ‘모순의 병존’이란 요소와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김지영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원은 전시서문에서 “이명진의 작품은 다양한 크기와 두께의 조각을 이어 미묘한 공간감을 드러내거나, 실제 계단의 모형이나 문을 만들어 입체적인 건축성을 구현하는 등 2차원과 3차원의 이미지가 결합된 다양한 시각적 효과를 보여준다”며 수공예적 제작과정으로 구축된 구조물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퍼즐 형식의 설치작품 외에, ‘오 수잔나’, ‘렛 잇 비’ 등의 추억 어린 음악이 흘러나오는 오르골을 나무상자 속에 담은 작품도 전시돼 흥미롭다. 단 수동으로 작동되므로, 무리한 작동 시에는 파손 우려가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본 전시는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자세한 문의는 02-725-6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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