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25. 2002 |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등 하나가 홀연히 빛을 발한다. 그 빛에 인도된 사람들이 또 하나의 등을 마음 속에 밝히고, 이 불빛은 다시 수많은 사람의 마음으로 이어지면서 세상의 어둠을 밝히게 된다. 이것이 《유마경》에서 설파하는 무진등(無盡燈)의 이치다. 굳이 불교적 가르침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미혹을 밝히는 한 줄기 등불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연등회가 종교적인 색채와 무관하게 사람들의 눈을 끌어당기는 이유도 화려함과 숙연함이 공존하는 등불의 매력에 있을 것이다.
흔히 등축제라 하면 석가탄신일 같은 특정한 날에나 접할 수 있기 마련이지만, 잊혀져 가는 등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전시 2건이 가을밤을 수놓고 있어 눈길을 끈다. 10월 25일까지 남산예술원에서 열린 전영일공방의 한국 전통등 전시회, 그리고 11월 3일까지 김포공항 내 잔디공원에서 열리는 ‘천하제일 중국등축제’가 그것이다.
먼저 소개하는 한국의 전영일공방은 1997년부터 전통등 복원에 주력해온 곳으로, 《조선왕조실록》, 《열양세시기》, 《동국세시기》 등의 고문헌을 토대로 한국 고유의 소재를 전통등으로 재현한 작품과 함께 현대적 감각으로 제작된 남대문, 월드컵 기념 축구선수, 서울시 캐릭터 왕범이 등 30여 점을 선보인다.
섬세한 장인의 손길 느껴지는 한국의 전통 등
전시된 전통등의 모습은 주악비천상, 오신상, 해태상, 귀면와 등 그 다양함을 자랑한다. 팔각등이나 연등처럼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형태를 넘어 복잡하고 입체적 형태를 정교하게 표현했다. 수박 만한 장식등에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거대한 등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예컨대 길이 6미터, 높이 4.5미터에 이르는 비천주악상은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 한 쌍이 금방이라도 구름을 타고 날아오를 듯 입체적인 형태로 표현됐다. 바람에 흩날리는 가느다란 옷고름 한 자락까지 프레임을 짜고, 한지를 바른 후 동양화물감으로 섬세하게 채색한 등 안에서 은은한 빛이 배어 나오는 모습은 현실을 초월한 듯하다. 파손되기 쉽고 습기에 약한 한지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등의 외피에 실리콘을 발라 마무리했는데, 실리콘으로 마감처리를 하면 탄력이 생겨 사계절 온도변화가 극명한 한국 기후에도 문제없이 견딜 수 있다.
본 전시회의 입장료는 무료이며, 전시시간은 정오∼오후 9시까지다.(점등은 오후 6시부터) 부대행사로 간단한 등을 만들고 열매처럼 나무에 달아 소원을 비는 ‘소망등 달기’ 행사도 열린다. 문의전화 02-790-5561.
장대함과 화려한 색감을 뽐내는 중국등축제
한편 김포공항 내 잔디공원에서 열리는 ‘천하제일 중국등축제’는 당나라 때부터 전승돼왔다는 중국 사천성 자공시의 등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로, 세트무대에 가까운 초대형 등 40여 점, 소형 등 3백여 점이 전시된다.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의 모험을 그린 ‘서유기’ , 나자가 동해용왕을 정복했다는 고전신화의 한 장면에서 유래한 ‘나타노해’, 등용문의 고사에서 유래한 ‘잉어약용문’등 각각의 등이 하나의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기계장치를 한 등이 움직이기도 하는 등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전시된 중국등은 관람자를 압도할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 특징. ‘천안문’의 경우 직접 등의 내부로 걸어 들어가 감상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해, 등이라기보다 소규모의 건축물에 가깝다.
아쉬운 점이라면, 등의 마감이 정교하지 않고 1970년대 유랑서커스단을 연상케 하는 플라스틱과 꼬마전구 등의 재료가 사용돼 장인의 손맛을 기대하며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할 수 있다. 특히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백설공주, 성냥팔이 소녀, 쥬라기 공원 등 어린이 관람자를 대상으로 한 국적불명의 등은 자못 치졸하다는 인상을 준다. 어쨌든 키치문화에 별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거나, 알록달록 화려한 불빛이 만들어내는 밤 풍경을 즐길 요량으로 나서면 그럭저럭 볼 만하다. 부대행사로 중국 빠수 기예단의 공연도 하루 세 차례 열린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성인 1만원, 초중고생 8천원, 만 4세 이상 6천원이며 관람시간은 오후 5시∼자정까지다(점등은 오후6시부터). 문의전화 02-3661-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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