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08. 2002 | 청담동 카이스갤러리에서 11월 23일까지 열리는 ‘고스트 하우스’전에서는 지우는 그림으로 유명한 작가 개리 시몬즈(38, 남가주대 교수)의 작품세계를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뉴욕 할렘가에서 인종차별을 겪으며 성장한 기억을 바탕으로 칠판과 벽 등을 화폭 삼아 작업해온 그는 이번 전시에서 대작회화 5점, 드로잉 20여 점 및 영상작업 1점 등을 전시한다.
개리 시몬즈의 작업방식은 제작과정에서부터 다른 작가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대부분의 그림은 작가 자신이 계획한 형상을 그리는 데서 완성되기 마련이지만, 그는 그림을 그리는 통상적인 절차에 덧붙어 한 가지 작업을 첨가한다. 바로 자신이 그린 그림을 손으로 문질러 지워버리는 것. 그의 작업은 지우는 행위를 위한 그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우는 행위가 보다 명료하게 보이도록, 분필 같은 영구적이지 않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흔들리는 모호한 형상 밖으로 분출되는 억압된 에너지
벽을 화폭 삼아 작업하는 작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의 작업도 강한 발언을 담고 있지만 겉으로는 그 발언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모노톤이 주조를 이루는 절제된 색채와 모호한 형태가 격한 느낌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을 지워 나가는 과정에서, 원래의 그림과 지워진 흔적이 손의 궤적을 따라 서로 겹치면서 드러나는 형상은 마치 심령사진처럼 모호하다. 침침한 바탕색 위에 흔들거리는 하얀 그림자는 남겨진 형상에서 억압된 에너지가 분출되는 듯하다.
벽에 그림을 그리고 지워버리는, 어떻게 보면 부질없기까지 한 행위는 밀폐된 곳에 갇힌 사람들이 살기 위해 최후까지 발버둥친 현장을 연상시킨다. 고통스런 흔적은 손가락의 지문이 지워질 만큼 사방의 벽을 밀어보고, 문지르는 과정에서 생긴 피묻은 손자국으로 고스란히 남겨진다. 고통이 커질수록, 공포가 압박해올수록 그 흔적은 격정적으로 증폭되지만, 벽이 그리 손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닌 만큼 먼저 나가떨어지는 것은 언제나 갇힌 사람 쪽이다. 개리 시몬즈의 작품에서는 이렇듯 사회적 편견 속에 갇힌 이의 고통과 분노가 피묻은 벽의 느낌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단지 그의 그림에선 핏자국 대신 분필의 하얀 궤적이 남겨진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형상을 지움으로써 벽 또한 지워나간다
거친 벽 위에 그림을 그리고 이것을 다시 손으로 문질러 지워내는 일련의 과정은 벽이라는 막막한 대상과 몸으로 싸운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벽은 언제나 거대하고 위압적인 존재로 버티고 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우기를 멈출 수는 없다. 물리적 공간에 갇힌 것만이 구속은 아닐진대, 그가 그림을 그려내고 지우는 벽 역시 소외계층을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한편 개리 시몬즈는 칠판이나 벽에 그렸다 지우는 이미지를 하늘에 옮겨심기도 한다. 예컨대 2층 전시실에서 상영하는 '사막의 바람'(DVD, 25분)은 일종의 ‘공간 드로잉’이다. 비행기에서 뿜어내는 흰 연기로 그려낸 별 모양이 푸른 하늘을 화폭 삼아 선명하게 드러났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흩어지는 과정을 자신의 작업방식과 연계시킨 발상이 기발하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 문의전화는 02-511-0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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