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29. 2002 | 반듯한 액자가 걸려있었음직한 전시장의 벽이 휑하니 비어있고,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상들이 그 위를 꿈틀거린다. 바닥을 스멀스멀 기어가는 녀석, 씨앗을 내뱉는 녀석, 벽 한 귀퉁이에 거미처럼 도사리고 앉아 이상스런 촉수를 뻗어내는 녀석…그 형태나 빛깔도 가지각색이다.
12월 3일까지 서교동 아티누스 갤러리에서 열리는 김연태의 ‘Wall Work-Works’전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언뜻 당혹스러우면서도 통쾌하다. 전시장 벽에 못 하나 박는 것도 화랑주의 눈치를 슬쩍 봐야하는 우리네 전시풍토에서, 이렇듯 기세 등등하게 벽 두 개를 캔버스 삼아 종횡무진 내달린 흔적은 대리만족마저 준다. 어린 시절, 집안 벽이며 마루에 마음껏 낙서하다 어머니 손에 붙들려 된통 혼쭐났던 아픈 기억이 있다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시원스럽게 벽과 벽을 가로지르며 꿈틀대는 형상들
아무 것도 없는 흰 벽은, 아무 것도 없는 캔버스만큼이나 ‘무언가를 그리고 싶은’원초적 본능을 자극한다. 그리고 김연태는 이 본능에 충실해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려나간다. 그의 벽화 속에 등장하는 형상들은 습한 방안에 자욱하게 퍼져나가는 곰팡이 균사처럼, 탐욕스럽게 잎과 가지를 뻗어대는 담쟁이 넝쿨처럼, 무차별적으로 두 벽을 잠식해나간다.
이 기괴한 생물유기체적 형상들은 관람자의 눈에 낯설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구석이 있는데, 그 형상들이 인체의 각종 장기나 생식기 등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미리 제작한 오브제가 드로잉 사이사이에 배치됨으로써 새로운 공간감이 생성되고, 평면과 입체, 면과 선이 화면에 강약을 부여하면서 구조가 넓은 두 벽을 탄력 있는 긴장으로 채운다.
평면과 입체, 면과 선이 부여하는 강약의 조화
한편 벽화 외에 작가가 직접 만든 소형 오브제도 전시된다. 마치 동물의 촉수나 식물의 뿌리 같은 형상의 오브제가 세포를 연상시키는 입방체 속에 나열되어 흥미롭다. 단, 벽과 액자는 둘 다 사각형을 기본 구조로 하고 있지만, 벽이라는 공간 위에 자생하는 형태가 자유분방함으로 가득한 반면, 소형 액자의 프레임 속에 들어차 있는 유기체적 형태는 그 안에 있는 에너지가 틀에 갇혀 마음껏 발산되지 못한 듯한 답답함이 남는다.
아티누스갤러리 이대형 큐레이터는 전시서문에서 “작가는 즉흥화법을 통해 차이의 간극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이 차이는 다이나믹한 생명력의 원천이 된다. 세포 하나 하나, 조직 하나 하나가 모두 중요하고 깨어있는 상태가 바로 김연태가 기원하고 있는 메마르지 않는 세상의 단면일 것”이라며 다양한 형상의 유기체가 공존하고 비움과 채움이 반복되는 김연태의 작품세계를 평가한 바 있다.
본 전시의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오후 7시까지이며 관람료는 무료다. 문의전화는 02-326-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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