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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불안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존재의 아름다움 - ‘판도라의 상자’전

by 야옹서가 2003. 1. 10.

 Jan. 10. 2003
| 인간을 닮은 존재를 자신의 손으로 창조하려는 인류의 욕망은 그 역사가 깊다.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이 만든 상아조각 갈라테아가 살아있는 처녀로 변했다는 그리스 신화는 그 대표적인 예다. 탈무드에도 언급된 진흙인형 골렘, 소설가 메리 셸리의 피조물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점차 진보중인 인간형 사이보그에 이르기까지 신화·예술·과학을 가로지르며 등장하는 인형에는 단순히 장난감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함축적 의미가 담겨있다.

관훈동 통인화랑에서 1월 21일까지 열리는 ‘판도라의 상자’전에서는 이처럼 인간과 사물의 경계선에 서 있는 특별한 존재로서의 인형을 다룬다. 본 전시는 1998년부터 일본 피그말리온 인형학교에서 수학하며 구체관절인형을 제작해온 인형작가 정양희가 작년 4월 귀국한 후 여는 첫 번째 개인전으로, 총 15점의 인형이 소개된다.

구체로 된 관절 이용, 자유포즈가 가능한 창작인형
 한국에선 아직 생소한 구체관절인형은 건조후 견고성이 커지는 석소점토나 목분점토 등으로 몸체를 만들고, 각각의 관절에 대응하는 연결부를 구로 처리해 자연스런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제작한 것이다. 속이 텅 빈 신체 각 부위로 고무줄을 통과시켜 몸을 조립하는데, 고무줄의 장력으로 균형이 잘 잡히면 받침대 없이도 자립할 수 있어 인형에 살아있는 듯한 생생함을 더한다.

사실적인 인체묘사가 돋보이는 정양희의 인형은 가슴이 채 여물지도 않은 소녀, 여린 몸매의 소년 등이 주류를 이룬다. 아이와 어른의 중간지점에 서 있는 이들의 모습 속에는 ‘인형’하면 떠올리기 마련인 귀엽고 예쁜 모습 외에도, 깊고 어두운 인간의 내면까지 포착하려는 의도가 곳곳에 스며있다. 모든 인형들이 숙명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죽어있으나 영원히 사는 존재’라는 모순을 지녔음을 상기하면, 그가 만든 인형의 표정에 깃든 희미한 애수를 이해할 수 있음직하다.

예컨대 한 쌍의 구체관절인형을 허리부분에서 접합한 ‘샴쌍둥이’는 절대적인 미의 기준에서는 일탈해있지만, 경계 위에 선 존재들에게서만 풍겨 나오는 기이한 아름다움이 극적으로 전달된다. 풍성한 머릿결에 핑크빛 피부, 생기가 도는 오른편의 소녀와 달리 왼편의 소녀는 퀭한 눈매, 앙상하게 드러나는 갈비뼈에 누렇게 뜬 피부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대극적인 상태에 있는 자매의 결합은, 피부 밖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구체관절로 인해 인간과 기계의 혼합체 같은 인상마저 준다.

한계상황에 놓인 인간의 형상화를 꿈꾸며
 인형작가 정양희는 “괴기스런 분위기까지는 아니겠지만, 극단적인 한계상황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해보고 싶다. 초기에는 사실적인 묘사에 비중을 뒀지만, 앞으로 만들 작품은 기계성과 인간성의 결합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부연설명을 거쳐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작품 대신, 사진 한 장만 보더라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는 인형작품집을 펴내고 싶다”며 향후 계획을 밝혔다.

또한 직접 인형을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에게는 “굳이 국내 구입이 어려운 석소점토나 목분점토가 아니라, 지점토나 찰흙처럼 구하기 쉬운 재료부터 시작해 점차 재료를 익혀나가는 것도 좋다. 재료보다 자신이 어떤 인형을 만들려고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본 전시의 전시관람은 무료. 관람시간은 오전 10시∼오후 7시까지이며 인형작품집도 현장에서 판매한다. 자세한 문의는 02-733-4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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