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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진짜 같은 가짜가 판치는 세계의 공허함 - 강홍구의 ‘드라마세트’전

by 야옹서가 2003. 2. 28.

Feb. 28. 2003
| 한참 인기 있는 모 TV드라마를 보다가, 엄청나게 심각한 장면에서 웃고 말았던 적이 있다. 드라마세트가 상류층 가정으로 설정된 터라 2층 계단난간이 있는 집이었는데, 의붓딸에게 친딸의 약혼자를 빼앗긴 엄마가 충격을 받고 비틀거리자, 견고하기 그지없어 보이던 계단난간이 그 흔들림 때문에 휘청휘청하는 것이었다.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진짜 같은 가짜’도 세상엔 수두룩한 법이다.

관훈동에 위치한 대안공간 풀에서는 이처럼 조작된 현실의 이면을 관조해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3월 4일까지 개최되는 40대작가 기획초대전 ‘드라마세트’ 전이 그것이다. 강홍구의 통산 4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는 방송촬영용 드라마세트를 찍은 대형흑백사진 십여 점이 소개된다. 사진 속에 일제시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거리를 재현한 세트장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가장 현실적인 공간을 흉내내는 공간의 비현실적인 실체
 ‘드라마세트’라는 공간의 당혹스러움은 직접 가봐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지만, 강홍구의 파노라마 사진 속에서 그 공간은 낯설고 공허한 풍경으로 재연되고 있다. 한 면만 있는 태극기, 멈춰버린 시계, 예스러운 점포 간판과 낡은 가짜 포스터, 드라마촬영이 끝나고 용도 폐기된 드라마세트에서는 쓸쓸함이 묻어 나온다. 이런 풍경은 드라마세트를 구경온 사람들의 현대적인 복장과 충돌하면서 더욱 기이한 느낌을 유발한다.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한 강홍구의 파노라마사진은 통상적인 사진보다 화각이 훨씬 넓다. 그렇다고 해서 별도의 광각렌즈로 촬영한 후 트리밍을 한 게 아니고, 여러 장의 사진을 사진보정 프로그램에서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이은 것이다. 강홍구가 사용했다는 기종은 니콘 쿨픽스990인데, 이 카메라는 최대광각이 38mm까지만 지원되기 때문에, 한 장의 사진으로는 이런 화각이 나올 수가 없다. 가로 2미터 내외의 대형사진으로 뽑아내기 위해선 해상도도 중요한데, 결국 새로운 장비를 사지 않는다면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는 것만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 셈이다.

디지털사진으로 강조되는 조작된 현실
 파노라마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촬영을 하면, 연결되는 각각의 컷을 찍는 시점이 미세하게 달라지고 노출 또한 미세하게 달라진다. 따라서 사진을 이은 부분에 경계선이 생긴다. 때로는 앞 사진과 뒤 사진의 아귀가 딱 맞지 않아 찍힌 사물이 겹치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경계면을 매끄럽게 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남겨둠으로써 현실의 조작성에 대한 폭로는 한층 강조된다. 기묘하게 조작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진짜 같은 가짜를 재조립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손쉽게 디지털카메라로 대상을 포착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어떤 피사체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앵글에 담느냐는 촬영자의 주관적 시각에 좌우된다. ‘디지털 사진은 사진의 아우라를 해체하면서도 실은 작가의 주관적 시선과 대상에 대한 의미부여를 더욱 강화시킨다’는 강홍구의 말처럼, 파편으로 나뉜 드라마세트의 풍경이 작가의 시각을 통과하면서 재조합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롭다.

본 전시의 관람시간은 오전 11시∼오후 7시까지이며 수요일은 8시까지 연장 개관한다. 관람료는 무료다. 자세한 문의전화는 02-735-4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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