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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안경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 황주리전

by 야옹서가 2003. 6. 13.


June 13. 2003
| 테가 굵직굵직하고 고급스러운 수입 선글라스, 할머니의 손때 묻은 안경집에서 막 나왔음직한 아담한 철제 안경,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처럼 고전적인 형태의 ‘라이방’선글라스, 김구 선생이 즐겨 썼던 동그란 뿔테 안경, 아이들의 앙증맞은 컬러안경…수많은 안경들이 하얀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마치 하늘을 검게 뒤덮은 수많은 나비 떼처럼 벽에 달라붙은 안경들의 모습은 광고효과를 노린 안경점의 독특한 디스플레이인가 싶지만, 실은 6월 28일까지 관훈동 노화랑에서 열리는 서양화가 황주리(46) 개인전 ‘안경에 관한 명상’전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세상을 보는 창으로서의 안경
 통산 23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 황주리는 기존에 보여주었던 이미지 콜라주 형식의 대형 회화작품과 더불어, 안경을 캔버스 삼아 앙증맞은 그림을 덧 그린 작품들을 선보인다. 주로 도시인의 일상을 재치 있는 의인화 작업을 곁들여 그려낸 평면회화 작업으로 인기를 누렸던 작가가 안경을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된 계기는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폴란드 여행 도중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발견한 죽은 자들의 수많은 물건들 중에서, 특히 안경들의 무덤이 어떤 예술작품보다 큰 시각적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1991년부터 2003년까지 틈틈이 제작해온 안경 그림은 수백 점이 넘는다.

한때는 세상을 보는 창이 되어주었을 임자 잃은 안경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의 흔적을 담은 사물은 여전히 남겨진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킨다. 예술의 영속성과도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곰곰이 뜯어보면 안경의 외양에서도 이러한 상징적 의미가 드러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경의 기본형은 무한대를 나타내는 기호 ∞와도 흡사하면서, 죽음과 재생의 순환고리를 하나의 생 안에서 경험하는 나비의 모습과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저마다 다른 사연 담은 다채로운 풍경을
그렇게 1층에 전시된 그 많은 안경들 중에 하나도 똑같은 그림, 똑같은 안경이 없다는 것은 신기하면서도 즐거운 시각적 경험이다. 마치 인간이 사물을 보는 관점이 저마다 다르듯, 또한 그 시력 역시 제각각이듯 말이다. 황주리가 보여준 기존의 회화작업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응시자의 눈은 안경이라는 최적의 캔버스를 만나 더욱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우울한 표정의 사람들, 일상의 소소한 사물들은 물론, 사물이 의인화되고 사람의 모습과도 자유롭게 결합되는 황주리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작가 황주리는 전시서문에서 “안경 알 하나 하나마다 카메라로 스냅 사진을 찍듯 매일 매일의 도시적 삶을 그려 넣는다. 그림을 그려 넣은 안경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 대화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벽에 걸린 안경들은 사람의 눈을 통하지 않고 제 혼자 세상을 바라보는 의인화된 존재들이다”하고 설명하면서 “살풍경한 도시문명의 풍자인 동시에, 내게도 당신에게도 있었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가버린 시간들에 바치는 몹시 개인적인 명상의 자리”라고 전시의 의의를 평가했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이며, 안경 오브제 외에도 ‘삶은 어딘가 다른 곳에…’‘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와 같은 대형회화 작품도 함께 전시된다. 자세한 문의는 02-732-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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