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제품 | 전시 | 공연

우리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인가 - ‘집’전

by 야옹서가 2003. 6. 20.

 June 20. 2003
| 경제한파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취업률이 바닥을 치는 요즘처럼 가정의 따뜻함이 절실한 시절은 드물 것 같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 가족, 내 집에서만큼은 나를 이해하고 받아줄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 생활고를 탓하며 이혼하거나 자녀를 나 몰라라 하고 버리고 떠나는 몰지각한 가정, 심지어는 친딸을 성폭행하고 구타하는 매정한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군상이 펼쳐지는 곳 역시 집이다. 가장 안락하면서도 폐쇄적인 공간, 작은 듯 하면서도 거대한 의미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집’이라는 공간은 연구해볼 만한 대상이다.

이에 한강로2가에 위치한 가갤러리에서는 7월 12일까지 개관기념전으로 ‘집’전을 개최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고자 열린 이번 전시는 강봉조, 고현주, 김범, 설승순, 김월식, 윤소연, 전재은, 정정엽, 천성명 등 회화, 설치미술, 사진 분야에서 활동중인 15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집이라는 거주공간의 외형적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의 기본단위인 가족, 구성원 각각의 심리적 관계 등 보다 내밀한 관계까지 다루고자 했다.

집 속에 담긴 사회적 의미, 심리 등 다뤄
올해 제작된 신작보다 기존 개인전 및 단체전에 이미 출품했던 작품을 다시 내보인 작가들이 대다수라는 점은 아쉬웠으나, 중견작가 김범을 제외하면 대부분 신진 급인 참여작가들은 흥미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예컨대 김월식의 종이조각 ‘활극도 긴장도 농담도 없는 내러티브’(2001)는 각각의 가구들과 그의 주인이 맺게 된 인연을 설명한 다음, 미니어처로 만들어낸 집안 가구들의 A4 용지에 인쇄된 전개도와 완성된 모습을 함께 전시함으로써 인간의 기억을 수치화되고 분해할 수 있는 사물로 치환했다. 


평범한 실내 풍경을 그려낸 듯하지만, 정정엽이 그려낸 조용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부엌’(2000) 역시 집 속에 내재한 불안과 강박관념을 풀어냈다. 배경은 부드럽게 뭉개 그려진 반면, 어디서 쏟아져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팥 알갱이는 마치 정밀묘사를 하듯 일일이 섬세하게 묘사해 마치 알알이 엉켜있는 적혈구처럼 붉은 산을 이룬 기이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집은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자리잡은 태풍의 눈
또 다른 독특함이 넘치는 작품으로 천성명의 영상설치조각 ‘길을 묻다’(2002)를 꼽을 수 있다. 그의 설치조각은 심리적으로 집이라는 안전한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시켜 나오려 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죄수복을 연상시키는 가로줄무늬 옷을 입고 빡빡 민머리를 한 청년이 닫힌 유리문 밖에서 쉴 새 없이 문을 두드리는 동안, 방 안 한 구석에 놓인 그의 분신은 얼어붙은 듯 쭈그리고 앉아 다른 곳을 응시하는 모습이 인상깊다. 그에게서 집은 닫힌 자아와 동일시되는 상태에 이른다. 한편 사진 작업 중에서는 아파트와 개인주택의 절묘한 대조를 적절히 보여준 강봉조, 재개발 예정인 아파트에 들어가 껍질만 남은 집과 바깥 풍경을 교차시켰던 고현주의 작품이 특히 돋보였다.

신설된 가갤러리가 둥지를 튼 삼각지는 예로부터 소위 ‘이발소 그림’의 성지로 널리 알려져 왔던 곳이다. 배고픈 화가들이 생계를 위해 키치적 대중취향에 맞는 그림들을 양산해냈고, 주변에는 액자 가게가 널려있지만, 오랫동안 순수미술의 논점과는 멀리 있었던 이곳 삼각지에도 미술계의 한 목소리를 실어줄 수 있는 공간이 생겼음은 주목할 만한 작은 변화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이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보다 자세한 문의전화는 02-792-873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