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30. 2003 | 일제강점기 한국인을 짓눌렀던 창씨개명의 압박은 일제 패망과 더불어 사라졌지만, 아직도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 한국인들이 한국식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선택이 아니다. 이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 쉬운 해외동포들의 지난한 삶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외모만으로는 일본인인지 아닌지 제대로 구분 못할 만큼 생김새가 비슷해, 이름만 바꾸면 외국인임을 굳이 드러내고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식 성과 이름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늘 새기고 살아가려는 의지의 표상으로 한국식 이름을 공적으로 드러내온 게 아닐까. 이번에 소개하는 곽덕준 역시 재일동포 작가이다.
정체성을 찾기 위한 몸부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은 오는 8월 31일까지 제1전시실에서 연례기획전 ‘올해의 작가 2003 곽덕준’전을 개최한다. 곽덕준은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쭉 살아온 재일 한국인 2세 출신으로, 개념미술적인 작품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 사진, 오브제, 퍼포먼스영상 등 총 9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작품활동 초기인 1960년대에 제작한 반부조 형식의 평면회화는 재료적 실험의 장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석고, 호분, 모래 등을 혼합해 마치 도자기 같은 질감으로 만들고 못으로 긁어 형체를 표현했지만, 아직까지 곽덕준 특유의 풍자적 시선이 등장하지는 못했다. 1970년대 들어 시작한 계량기 연작부터 개념미술적 성격을 띠는 위트 넘치는 작품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예컨대 ‘0 계량기와 돌’에서는 계량수단으로 저울이 등장하지만, 그의 저울은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물건이다. 이미 무거운 돌을 올려놓았지만 바늘은 0킬로그램을 가리키고 있다. 때로는 서커스단의 곡예사들이 인간 피라미드를 만들듯이 저울로 층층이 탑을 쌓기도 하는데, 이처럼 작품 속에 직접 등장하는 계량기는 객관성과 보편적인 진리를 상징하는 물체지만, 작가는 이러한 연출을 통해 객관성이란 것의 기준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을 던지는 것이다.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의문
변치 않는 기준점은 자기에 대한 확신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자기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자신과 외부세계와의 관계에서 해답을 찾고자하는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다. 곽덕준의 대표작 중 흥미로운 작품으로 ‘클린턴과 곽’, ‘부시와 곽’ 등의 작품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타임》지 등 세계 유수 잡지의 표지모델로 실린 각국 정치지도자들의 얼굴 아랫부분을 거울로 가리고 그 거울에는 자신의 얼굴을 비춘 뒤 사진을 찍어 만든 초상사진이다. 유명인과 무명인, 권력자와 소시민, 서양인과 동양인이라는 대립항이 한 컷의 흑백사진 속에 적절히 녹아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성인 2천원, 초중고생 1천원이다. 본 전시 외에도 한국현대판화모음전(제2전시실,∼6월 22일), 사진가 임응식 특별전(제6전시실,∼7월 27일), 작고 20주년 기념 오지호 소장품 특별전(제5전시실,∼7월 13일) 등은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문의전화는 2188-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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