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3. 2003 | 한국미술계에서 40대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작품세계가 독특하고 작가로서의 성장가능성이 보이는 사람들은 대개 30대까지만 해도 유망작가로 분류돼 평단의 주목을 받고 몇 차례의 기획전과 개인전에 참여하게 된다. 간혹 유수 미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40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얘기가 좀 달라진다. 미술계에서도 존재하는 소위 ‘낀 세대’에 들어서는 것이다.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30대 작가들, 이미 중진작가로서 확고한 사회적 위치를 차지한 50대 작가들 사이에서 40대 작가들은 상대적인 압박을 받는다. 때로 매너리즘에 빠진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변화를 한번 줘볼라치면 자기 작품세계는 내팽개치고 유행만 따른다고 호된 질책을 당하기도 한다. 작품도 하고, 틈틈이 밥벌이도 해야 하는 데다, 아이들 양육에도 신경을 써야하니 삼중고가 따로 없다. 남성작가들보다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은 여성작가들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오랜 시간의 궤적을 담은 고요하고 차분한 작품
세종로에 위치한 일민미술관 전관에서 6월 22일까지 열리는 ‘미완의 내러티브’전은 왕성한 창작열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처럼 여러 가지 힘겨운 상황과 맞서 싸우는 40대 여성작가군의 창작의욕을 고취하고 그들의 활동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된 전시다. 한국적 미니멀리즘을 동양화 속에 펼쳐보인 강미선(한국화), 환상 속의 에로티시즘을 상징적으로 녹여낸 염성순(서양화), 기발한 퍼즐조각가 유현미(조각·설치) 등 3명의 작품 속에서 때로는 기발함으로, 때로는 진중함으로 승부를 거는 그들만의 세계를 접할 수 있다.
세 명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쌓아올린 흔적이다. 그것이 재료이든, 시간이든, 감정이든 간에 말이다. 거칠거칠하면서도 따뜻한 특유한 질감을 만들기 위해 차곡차곡 한지를 쌓아 가는 강미선의 작업이 그렇고, 파도처럼 넘실대는 형상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염성순의 채색화 역시 인내심 없이는 완성이 불가능한 작업이며, 유현미의 퍼즐 작업은 만들고 쌓아올리고 조립하는 과정 자체가 조심스럽고 오랜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내면을 다스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이들의 작업은 ‘빨리빨리’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현대사회의 삶이 과연 옳은 것인지 돌이켜보게 한다.
특히 1층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강미선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거쳤을 수고로움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한 느낌이다. 툭툭한 느낌의 한지를 겹겹이 붙이고 또 붙여 도톰하게 두께를 만들어낸 다음 먹물을 옅게 먹이고, 또다시 좀 더 짙은 먹물을 먹인다. 정으로 거칠게 표면을 다듬은 화강암처럼 오돌토돌한 면이 생겨나고, 위에 그려진 선들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화면을 구획한다. 그 느낌은 박수근의 ‘나목’과도 흡사한데, ‘나목’의 표면처리가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향하는 것과 달리 강미선의 작품은 그 역을 향한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이다. 검은가 하면 푸른빛이 돌고, 어느새 잿빛으로 변하는 다채로운 먹빛의 변화가 인상깊은 작품이다.
‘빨리빨리’의 신화를 뒤집는 낮은 목소리
한편 2층에 전시된 염성순의 채색화는 그 복잡하고 다채로운 형상과 화려한 색채의 향연이 어우러져 관람자의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때로는 파도처럼 크게 솟구쳐 올랐다가 자잘한 포말과 함께 스러지고, 때로는 구름처럼 깃털처럼 가볍게 부풀어올라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의 그림에는 뚜렷한 구상적인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대신 몽환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이처럼 화려한 색채가 이글대는 꿈의 화폭을 펼쳐내기 위해서는 세필로 수없이 많은 부분을 꼼꼼히 그려내야 한다.
염성순의 작품 반대편에 자리잡은 유현미의 설치조각은 독특하다. 앞서의 두 사람이 회화적 구성에 충실했다면 그의 작품은 다양한 재료들의 실험무대처럼 보인다. 아들과 함께 놀다가 뒤집힌 퍼즐의 뒷면을 보고 착안한 퍼즐 시리즈는 기억의 편린을 모아 창작의 원동력으로 사용하는 무한한 상상력이 발휘된 지점이다.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텅 빈 퍼즐은 바닥에 평평히 깔리거나, 조각처럼 수직적으로 쌓이기도 하고, 벽에 그림처럼 걸리기도 하는 등 다채롭게 변화한다.
이들의 작품은 왜 미완의 내러티브일까? ‘낀 세대’로서 좌절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작가적 내공이 축적된 상태기에 난관을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저력 역시 내재돼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일관된 자신만의 목소리를 잃지 않고 꾸준히 작업중인 이들의 ‘50대’를 기대해본다.
본 전시의 입장료는 1천원이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문의전화는 02-2020-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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