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05. 2003 | ‘지원의 얼굴’. 제목만 봐서는 어떤 작품인지 감이 오지 않겠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교과서에서 누구나 한번쯤 보았을, 조각가 권진규의 테라코타 초상조각이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단아한 얼굴, 속세를 떠나 영원을 응시하는 듯한 초연한 시선, 길쭉한 목 아래 어깨를 가파르게 깎아 더욱 가냘파 보이는 몸매…. 마치 고귀한 정신성의 구현과도 같아 인상깊은 작품 중 하나이다.
9월 15일까지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2, 3층에서 열리는 권진규 30주기전은 대표작 ‘지원의 얼굴’을 비롯해 테라코타, 건칠, 석조, 목조 등 대표작 70여 점, 초기 스케치 30여 점, 작가 사후 남겨진 석고틀에서 재현한 ‘여인’ 등 미공개작 20여 점을 포함해 총 1백20여 점이 전시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자소상’, ‘춘엽니’등 권진규 특유의 조형미를 보여주는 초상조각은 물론, 동선동 작업실에 남아있던 작가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져온 자료관도 마련됐다. 특히 전 부인 도모 여사가 소장하고 있던 일본 무사시노미술학교 유학시절의 스케치북 2권, 1973년 권진규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지인들에게 보낸 유서 등 희귀자료도 볼 수 있다.
대표작과 미공개작, 관련 사료 등 다양한 자료 집대성해
권진규의 작품은 고전적 절제미와 함께,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구태의연한 흔적을 느낄 수 없는 현대적 미감이 조화를 이룬다. 작업실 벽에 ‘범인에겐 침을, 바보에겐 존경을, 천재에겐 감사를’이란 글귀를 써 붙일 만큼 자의식이 강했던 권진규는,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지 않고 흙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낸 조각을 통해 흙으로 표상되는 자연의 내재된 생명력까지 전달한다. 이러한 특징은 2층에 주로 전시된 동물조각상에서 더욱 생생하게 구현된다. 또한 그동안 거의 전시될 기회가 많지 않았던 목조불상조각에서는 불교적 명상의 세계에 매료된 그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주로 인물초상을 다룬 3층 전시실에서는 권진규의 독특한 작업방식을 보여주는, 한 쌍씩 짝을 이룬 작품들이 눈에 띈다. 인물초상을 만들 때 대개 모델의 실명을 작품명으로 사용하곤 했던 권진규는 모델을 세워 테라코타를 제작할 때, 틀에서 동일한 작품을 두세 점 떠내 한 점은 모델에게 주곤 했다. 그의 인간적 면모를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제작된 작품들이 마치 쌍둥이처럼 동일한 형태의 작품으로 전해졌는데, ‘영희’, ‘여인두상’ 등의 전시작품이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비극과 구원의 양면을 지닌 세상을 조각에 담다
미술평론가 최열은 “권진규는 자신의 고뇌와 시대의 우울함을 일치시킬 수 있었다. 부드러운 흙을 그토록 음울하고 신비로운 것으로 바꿔버릴 수 있는 근원의 힘은 세상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비극과 구원의 양면이 지닌 세상의 긴장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라고 권진규의 작품세계에 대해 평한 바 있다. 다른 작가들이 ‘돈 되는’ 조형물 작업을 할 때에도 오로지 순수조각만 고집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권진규의 작품세계를 초상조각부터 동물조각, 부조 등 다양한 면모로 접할 수 있는 드문 전시인 만큼, 그의 조각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번 가봄직하다.
입장료 성인 5천원, 관람시간 오전10시∼오후7시까지, 월요일은 휴관한다. 문의전화 02-73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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