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24. 2003 |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여러 화장품 회사에서 새로운 색깔을 내세우며 얼굴을 캔버스 삼아 펼치는 색채의 향연을 보고 있으면 그 기발함에 놀라게 된다. 라운지 카키, 허니 브라운, 프리즘 바이올렛, 크렌베리 스쿼시 등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지만 새롭게 조합해낸 색깔 이름 역시 당대의 유행코드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이처럼 미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다채로운 색채로 대변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화장품은 예술의 창조적 성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아모레퍼시픽 브랜드 ‘헤라’ 주최로 9월 30일까지 열리는 ‘크로매틱 센세이션’전은 화장품 회사가 예술 마케팅의 일환으로 현대미술과 손을 잡은 대표적 사례다. 이번 전시에는 영국현대미술의 선도주자로 손꼽히는 yBa(young British artist)세대 작가 데미안 허스트와 안젤라 블로흐를 비롯해 노상균, 김희경, 유현미, 오인환, 왕기원 등이 참여해 예술이 창조되는 공간으로서의 작업실과 색채의 향연을 주제로 작품을 선보였다.
예술가의 작업실 - 가장 창조적인 공간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작가의 작업실을 묘사한 데미안 허스트와 노상균의 공간해석이다. 토막낸 동물의 사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가득 담긴 유리상자 안에 넣어 전시하는 충격적인 작품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는 데미안 허스트는 ‘Contemplating a Selfportrait(as a Pharmacist)’(1998)에 아예 자신의 작업실을 압축해 유리상자 안에 넣어 보냈다. 이중 구조로 된 유리상자 안에 화구들, 캔버스와 이젤 등을 집어넣고, 약사복을 이젤 뒤에 걸쳐 제목에서와 같은 내용을 암시하는 이 작품은 박제된 예술가의 초상이라 할 만하다.
반면 국립현대미술관 ‘2000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바 있는 노상균은 깔끔하고 빈틈없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업실과 달리, 방심한 듯 풀어헤친 공간구성으로 예술가에 대한 대중의 거리감을 완화시키고자 했다. 평면회화나 조각 위에 물감을 칠하는 대신, 반짝이 스팽글을 일일이 붙여 만드는 것이 노상균 작품의 특징. 불상, 예수상 등의 엄숙한 형상과 키치적 감수성으로 뒤덮인 화려한 표면처리가 대비되면서 성과 속이 교차하는 모습이 인상깊다.
화려한 색채의 향연
한편 화장품과 관련된 전시답게 색채에 대한 관심도 두드러졌다. 지하1층 전시장 벽을 수많은 픽셀로 나누고 색채팔레트처럼 칠한 대형 벽화가 장관을 이루는 가운데, 점멸하며 매순간 다른 색상을 내뿜는 픽셀 상자를 설치한 미디어아티스트 안젤라 블로흐의 작품, 강렬한 노란색 물감을 칠한 원형 캔버스 위에 나비 표본을 붙여 인공색채와 자연색채를 대비한 데미안 허스트의 색채패널 작품, 온통 푸른빛이 도는 사진들로 벽을 모자이크한 스펙터클한 색의 현장을 온몸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한 오인환의 근작 ‘메이드 인 코리아’, 붉은 색으로 칠한 거대한 퍼즐 한 조각을 잔디밭 위에 설치해 시각적 대비효과를 극대화한 유현미의 작품 등 다채로운 색상의 도입이 눈길을 끌었다.
이번 전시는 미를 추구하는 기업과 예술가들이 서로 만나 시너지효과를 창출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관람자들에게도 일상 속 색채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전시다. 조금 작가 지명도가 있다 싶으면 유료전시가 넘쳐나는 요즘, 쟁쟁한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을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들러볼 수 있을 것이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다. 문의전화 02-734-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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