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01. 2003 | 서울 대림미술관에서는 10월 19일까지 사진가 김기찬 초대전을 개최한다. 김기찬은 1960년대 말부터 도시서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골목 안 풍경을 평생 주제로 삼아온 작가다. 그가 30여 년 간 찍어온 ‘골목안풍경 ’연작 중 대표작 120여 점을 엄선한 이번 전시는 ‘친구야, 그거 기억나’라는 전시부제가 말해주듯, 이젠 도심에서 보기 힘든 골목길 특유의 따뜻하고 정겨운 풍경을 사진 속에 되살렸다.
얼굴도 모르는 낯선 외부인이 들이대는 카메라는 위협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카메라 앞에서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거나 사진 찍히는 걸 거부한다. 김기찬 역시골목 풍경을 찍기 시작한 초창기 1, 2년 간은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대는 대신, 끈기 있게 발품을 팔아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서 신뢰를 쌓아나갔다. 오해를 살 우려가 있기에 젊은 부인들의 사진은 작가의 나이 50세가 넘었을 때 비로소 찍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의 얼굴이 이웃처럼 친근해질 무렵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의 속내를, 남루하지만 정이 넘치는 생활공간을 열어 보여줬다. ‘골목 안 풍경’은 김기찬이 그렇게 사람들과 친숙해지고 나서야 찍을 수 있었던 사진이었다.
가난 때문에 오히려 넓어진 나눔의 공간 - 골목
가난한 사람들에게 골목은 동네사람 모두의 공간이자, 다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소였다. 사람들은 뭔가 할 일이 생기면 비좁은 집을 벗어나 골목으로 나왔다. 골목길에 대야 하나만 가져다 놓으면 벌거벗은 꼬마들이 떼로 모여 더위를 씻는 욕탕이 됐고, 바리깡을 든 할아버지가 머리를 숭덩숭덩 깎아주는 골목은 노천 이발관이 되었다. 대문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양푼에 밥 비벼 나눠먹는 아낙들, 골판지 상자를 깔개 삼아 뒹굴며 숙제하는 아이들을 골목에선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옆집 밥그릇이 몇 개인지조차 훤히 알고 있었고, 서로의 속사정을 잘 아는 만큼 정을 나눌 기회도 잦았다.
거창한 제목 대신 동네 이름과 찍은 날짜를 제목으로 삼은 김기찬의 사진 속에는 오늘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도 눈에 띈다. 나무로 만든 텔레비전 껍데기 속에 들어가 얼굴을 빼곡이 내민 장난꾸러기들, 한 손에는 큰 가위를, 다른 손엔 고물을 든 엿장수가 아이에게 줄 엿가락의 길이를 가늠하는 모습, 혹시 이사 도중에 어린 딸을 잃을까 싶어 아예 장롱과 함께 묶어 리어카에 싣고 가는 아저씨…서울 중림동, 만리동, 공덕동, 도화동 등 서울 속 소외지역이었던 이곳은 그렇게 김기찬의 사진 속에서 소중한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세월의 흐름 담은 정겨운 사진들
30여 년간 꾸준하게 골목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찍어온 덕분에, 김기찬은 여러 가족의 성장사를 포착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것은 중림동에서 찍은 쌍둥이 자매의 연작사진이다. 골목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놀던 어린 쌍둥이 소녀들이 꼬마숙녀로 자라고 중년여인이 돼 반백의 어머니와 함께 선 모습까지, 1972년부터 2001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찍은 사진은 29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변치 않는 작가의 주제의식을 오롯이 담은 사진들은 세월이 흘러도 그 빛을 잃지 않는다.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여전히 정겹고 따뜻하다.
이번 전시의 부대행사로 대림미술관 1층 로비에서 전시기간 중 매주 토요일 2시 30분에 작가와의 대화 시간이 마련된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성인 4천원, 소인 2천원이며, 홈페이지 내의 할인쿠폰을 인쇄해 가져가면 50% 할인가에 관람할 수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11시∼오후 7시까지(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전화 02-720-0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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