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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고양이 여행] 한국

밀크티 길고양이, 도심 숲에서 보낸 1년

by 야옹서가 2008. 10. 15.
2007년 10월, 밀크티 빛깔의 길고양이를 처음 만났다. 이제 갓 청소년기에 접어든 그 고양이는, 홍차에 우유를 탄 것 같은 독특한 털코트를 입고 있었다. 먹는 것이 부실해서 그런지 비쩍 말랐지만, 흔치 않은 미묘였다. 그 고양이를 잊지 않도록, 밀크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도심에서 자연 그대로의 숲이 사라진 지 오래다. 사람들은 숲을 없앤 대신 길가에 가로수를 세웠다. 하늘 높이 치솟은 고층건물 뒤로 생색내듯 화단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공의 숲에, 길고양이들이 세들어 산다. 밀크티도 그런 숲의 세입자들 중 하나였다.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제 집이 아니기에 늘 눈치를 보면서, 나무덤불 아래로 숨어다녔다. 

가끔, 밀크티는 비쩍 마른 몸을 웅크려붙이고 난간에 올라와 햇빛을 쬐곤 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밥 대신 햇빛을 먹었다. 광합성이 필요한 식물처럼, 고요하게.




모든 길고양이에게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이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08년 5월, 
젖소무늬 아깽이와 삼색 고양이 한 마리가 혹독한 겨울을 나지 못하고 사라진 뒤에도, 밀크티는 살아남았다.   


누군가 버리고 간 소시지 껍질을 핥으며, 가끔은 쓰레기통을 뒤지며, 뽀얗던 밀크티의 입술에도 거뭇거뭇 때가 묻었다. 까칠한 혓바닥을 내밀어 나름대로 몸단장을 하지만, 험하게 살아온 세월의 때까지 깨끗하게 벗겨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작년 10월 처음 만났을 때 생후 6개월 안팎으로 보였으니, 아마 밀크티는 이맘때 1살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2008년 9월 중순경, 다시 만난 밀크티는 놀랍도록 성숙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키 작은 나무덤불 아래를 동굴처럼 드나들며 잽싸게 이동할 줄 알게 되었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여유롭게 뛰어놀았다.


무엇보다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매가 고요하고 깊어졌다. 1년 전 어린 고양이일 때 보았던 불안한 눈동자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신산스러운 1년을 겪어온 연륜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밀크티가 버텨 온 지난 1년을 곁에서 하나하나 지켜보지는 못했으나, 살아남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길고양이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줄 모른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태어났으니까, 있는 힘을 다해서 사는 거다. 그뿐이다.

누군가 먹다 남긴 매운 국물에라도 발을 적셨을까, 앞발이 주홍색으로 물들었다. 열심히 핥아보지만 기름기에 절었는지, 쉽게 빠지지 않는다. 인간이 먹는 염분 많은 음식을 먹게 되면, 길고양이의 몸도 쉽게 상한다. 고양이의 작은 신장은, 나트륨이 범벅된 음식의 강한 자극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러나 그거라도 먹지 못하면 살 수 없으니, 일단 눈에 띄면 먹게 된다.


얌전히 모은 두 앞발이 가지런한데, 정체 모를 국물에 절은 한쪽 발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나는 밀크티에게 "다음 생에는 행복하게 태어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생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든 그건 다른 삶이지, 지금 밀크티에게 주어진 '바로 그 삶'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한번뿐이다. 고양이의 삶은, 특히나 길고양이의 삶은 짧다.  밀크티가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이어가기를, 마지막 순간 역시 자신의 선택으로 매듭지을 수 있기를, 그리고 그 과정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기를 바란다.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왜 길고양이를 찍느냐고, '뉴스 깜'도 안 되는 걸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느냐고. 그러나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길고양이가 아니라, 해충처럼 박멸시키면 그뿐인 길고양이가 아니라, 그들도 살고 싶어하고,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부지런히 찍고 쓰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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