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12. 2002 | ‘세상의 언어가 단 하나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학실력 때문에 곤란을 겪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해봤을 생각이지만, 이들은 노아의 후손들을 원망할 일이다. 구약성경 창세기를 보면 노아의 후손들이 하늘까지 닿는 바벨탑을 쌓으면서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한 탓에, ‘괘씸죄’가 적용돼 인간의 언어가 서로 달라졌다니까. 혼란에 빠진 인간들이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과만 교류하면서 인종과 언어가 세분화됐다는 이야기다.
인종과 언어를 매개로 풀어낸 상호이해의 장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1·7 전시실에서 8월 4일까지 열리는 바벨2002전은 앞서 언급한 바벨탑 이야기에서 착안한 전시다. 타민족간의 차이가 극명하게 담긴 대표적 요소로 ‘인종’과 ‘언어’를 선정하고, 이를 주제로 삼아 창작활동을 하는 국내외 작가 51명의 작품 1백2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다른 언어,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로 상대를 배타하고, 때론 전쟁까지 불사했던 역사를 넘어 예술 안에서 화합을 추구하는 것이 전시의도인 만큼, 현대예술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유럽 작가들과 더불어 사우디아라비아, 코스타리카, 카메룬, 에콰도르 등 국내에 소개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제3세계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돼 눈길을 끈다. 언어가 다른 만큼이나 세계 각국의 작가들이 선보이는 조형언어도 다채롭다.
예컨대 첫 번째 주제인 ‘인종-얼굴’에서 볼 수 있듯, 얼핏 보기엔 비슷한 사실적 기법의 작가들이라도 사회·문화적 배경에 따라 작품성향이 달라진다. 감정을 배제하고 인물을 사진처럼 그려낸 척 클로스의 포토리얼리즘 회화는, 판화의 칼맛을 살려 국내 이주노동자의 거친 삶을 은유한 정원철의 리얼리즘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재창조된 얼굴의 형태를 관찰하는 것도 흥미롭다. 컴퓨터성형으로 기괴하고 강렬한 여인상을 만들어낸 오를랑은 서구적 미인의 기준을 가볍게 웃어넘긴다. 사람의 눈과 입을 TV수상기로 대치한 설치작품으로 기계문명 속 인간의 자화상을 그려낸 백남준, 철망을 입체적으로 재단해 익살스런 얼굴 모양을 만들어내며 미세한 감정변화를 포착한 히시야마 유코 등 상이한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들은, ‘서로 다름’이란 요소가 다양성의 한 맥락으로 존중돼야 함을 보여준다.
미술관에서 벌어지는 문화 월드컵
한편 두 번째 주제인 ‘언어-대화’는 문자의 형태와 의미를 소재로 삼는 작가들을 소개했다. 머리카락으로 상형문자인 한자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구 웬다, 문자의 형태를 그림처럼 활용하는 김홍주 등은 의미와 형태를 동시에 표현하는 언어의 조형성을 적절히 활용한 예다. 이밖에도 메시지를 전광판으로 직접 전달하는 제니 홀저, 캔버스에 끝없이 숫자를 쓰는 작업을 지속해온 로만 오팔카, 관람자가 언어습득 과정을 웹아트로 체험하게 한 밥 & 스미스 등, 언어를 매개로 한 다양한 발상들이 선의의 경쟁을 벌인다.
성경 속 바벨탑은 인간의 오만을 경계하는 상징이었지만, 미술관 안에 세계 각국의 미술작품으로 쌓은 바벨탑은 서로의 차이를 즐겁게 받아들이는 수용과 이해의 상징이다. 스포츠를 매개로 세계가 하나되는 월드컵은 끝났지만, ‘미술 월드컵’ 은 아직도 과천에서 뜨겁게 진행 중이다.
관람료는 일반 2천원, 18세 미만 1천원. 주말에는 3시부터 전시설명회가 개최된다. (월요일 휴관) 본 전시 관람권으로 7월 14일까지 제2전시실에서 개최되는 ‘한일현대미술전-또다른 이야기’전 도 함께 볼 수 있다. 문의전화 02-2188-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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