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27. 2002 | 관훈동 성보갤러리에서 12월 31일까지 김수자의 ‘일러스트에세이-블루’전이 열린다. 통산 2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 김수자는 김혜순, 안도현, 장석남, 나희덕, 함민복, 남진우, 기형도 등 평소 애송해온 한국현대시인들의 시 17편을 다시 그림으로 풀어냈다. 시에 붙는 삽화라면, 차곡차곡 쌓인 글 사이로 드문드문 숨통을 틔워주는 몇 장의 평면적인 그림을 떠올리기 쉽지만, 김수자가 선보인 것은 지점토를 주재료로 사용한 입체 일러스트레이션이다.
지점토와 재활용 상자 사용한 입체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자는 오랫동안 출판 일러스트레이션을 제작해온 자신에게 있어 텍스트와 그림의 결합은 무엇보다 익숙하다고 설명한다. 작가는 손에 익은 재료인 지점토로 저부조 형상을 만들어 캔버스에 붙이기도 하고, 재활용 상자를 이용해 배경을 만들어 넣고 점토인형을 배치해 연극무대의 한 장면처럼 공간을 연출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시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풍경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현장과 맞물려있지만, 초현실적인 풍경도 한 자락 녹아있다. 이를테면 집안의 수족관이 어느새 노을지는 바다가 되어버린다거나, 둥실둥실 떠 있는 구름을 의자 삼아 쉬고 있는 회사원, 귀가 도중의 담벼락이 마치 거대한 서류봉투처럼 눈앞을 가로막고 ‘하던 일 마저 하고 가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은 환상에 시달리는 중년 사내에 이르기까지 상상과 현실을 오가며 펼쳐지는 풍경들이 이색적이다.
예컨대 ‘환상을 위하여’라는 작품에서는, 멀쩡하던 집 지붕이 깜짝상자처럼 열리고 집 안의 세간들이 중구난방 사방으로 솟구친다. 물기 마를 날 없던 고무장갑, 화장대, 한참 박음질 중이던 미싱, 생선찜을 하던 냄비, 심지어 집안 일을 하고 있던 여인까지 마치 팝콘이라도 된 듯 하늘로 날아오른다. 집 지붕이 터지고 가재도구가 사방으로 흩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여인의 모습이 더없이 홀가분해 보이고,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는 듯 두 팔이 하늘로 한껏 향해 있는 게 의아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동명의 시를 함께 읽어보면, 이 장면이 뜻하는 바는 보다 명확해진다.
환각처럼 꿈이 되살아나는 순간 밥은 타서 / 공기는 매캐해지고, 식기는 깨져 흉기가 되고. / 세탁기는 헛돌고…… / 집은 不安全하게 기우뚱거리며 운다. / 환상으로 몸이 차오른 나는. / 자꾸 환상을 새끼친다. (양선희, 환상을 위하여)
푸른 희망의 빛깔 속에 소시민 체험 고스란히 옮겨
고된 일상을 하루하루 일궈나가는 시 속 화자의 심상에, 주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살아가는 작가의 감정이입이 이뤄져있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1995년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서 빨래판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려냈던 작가가 이번 전시에선 빨래판 모양으로 본을 뜬 점토판을 등장시켜 소시민적인 삶을 그려낸 것도 인상깊다. 그의 작품에 배경색으로 자주 등장하는 푸른색이 희망을 상징하듯, 김수자의 시선도 우울한 세상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빛줄기를 잡고 있는 듯하다.
이번 전시는 무료로 관람 가능하다. 자세한 문의는 02-730-8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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