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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이중그림의 시각적 즐거움 - 한수정전

by 야옹서가 2003. 4. 4.

Apr. 04. 2003
| 화장대 앞에 앉아 몸단장을 젊은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준비를 하는 것일까, 육감적인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화장에 여념이 없는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거울에 비쳐지는 형상을 주목하면 어느새 눈에 띄는 해골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여인의 모습에 시선을 두고 있으면 알 수 없지만, 화장대의 거울을 보고 있으면 여인의 뒷머리와 거울에 비친 앞 얼굴은 해골의 눈 모양이 되고 화장대는 앞턱 모양으로 보이게 된다. 배니타스를 암시하는 이 그림은 한 장면에 두 가지 이야기를 담은 일종의 이중그림이다.

서교동 아티누스갤러리 2층에서 4월 9일까지 열리는 한수정 개인전도 이와 같은 이중그림을 다루고 있다. 다만 앞서 언급한 이중그림들의 장치가 한 장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것인데 비해, 한수경의 이중그림은 좀 더 여러 단계를 거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종이 위에서 펼쳐지는 두뇌싸움 
그의 작품은 두 가지 이미지를 담고 있지만, 처음 보아서는 두 이미지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지하기란 쉽지 않다. 그저 아래위로 다른 그림을 붙여놓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한수정이 이중그림을 위해 마련한 장치가 있다. 바로 겹겹이 쌓인 트레팔지다. 트레팔지 위에 그려진 드로잉은 그저 바코드처럼 쭉쭉 뻗은 직선이거나, 물결처럼 굽이굽이 구부러지는 자유곡선이거나, 검은 점과 선과 면이 불규칙하게 올라있는 먹지처럼 보인다. 시선을 두는 곳에 따라 전경과 배경이 어느 순간 휙휙 뒤바뀌는 모습이 신선하다.

드로잉이 끝나는 부분의 면적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반투명한 트레팔지가 한 겹 한 겹 쌓이면서 노출되는 종이 하단부의 이미지는 조금씩 달라지고, 이것이 모여 트레팔지 위의 드로잉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떠오른다. 이 때 트레팔지를 쌓아올리되 키를 맞춰서 올리는 게 아니라, 맨 위의 선은 맞추되 아랫부분은 일정한 간격으로 조금씩 짧아지게 하는 것이 트릭의 핵심이다. 얼핏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로 공이 많이 가는 작업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흑과 백, 전경과 배경으로 나뉘는 대립적 요소 
검은색 시트지를 사용해 출입문이나 창문, 전선 같은 실제 사물을 그림자로 묘사해 실제인지 그림자인지 혼돈을 불러일으켰던 초기작을 넘어 최근 몇 년간 한수정이 보여주는 작업들은 드로잉을 넘어 점과 점, 선과 선이 만날 때의 모습으로 대치되면서 디지털 점묘화와 같은 양상을 띤다.

기획 및 진행을 맡은 이대형 큐레이터는 전시서문에서 “주제 대신 배경을 그린 한수정의 전략은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진화한다. 이전 작업이 주제와 배경 사이의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도발적인 시도였다면, 이번 라인 시리즈 작업은 회화를 회화답게 만들어 보이는 점과 선의 역할에 초점을 맞췄다”며 한수정 작품세계의 변천을 설명했다.

본 전시는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갤러리건물 1층에 위치한 예술서점 아티누스에서는 재고도서 할인판매 행사도 열리고 있어 겸사겸사 들러보면 좋을듯하다. 자세한 문의전화는 02-326-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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