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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적 삶에서 발견한 초월의식 - 다이안 아버스

by 야옹서가 2003. 8. 8.

Aug. 08, 2003 |
이른바 ‘조형사진’이라고 불리는 만들어진 사진들이 유행처럼 퍼져나가는 요즘, 사진에 어떤 조작도 가하지 않고 우직하게 찍어낸 사진이 설 입지는 상대적으로 많이 좁아진 듯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 분야는 현란한 합성기술로 눈길을 사로잡지도 못하는 데다, 흑백이 주류를 이루는 소박한 색감은 화려한 컬러사진에 종종 압도되곤 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사진만큼 스트레이트 사진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분야도 드물다. 사진을 통해 진실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가장 적확히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거듭나게 한 두 번의 만남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는 현대다큐멘터리 사진의 역사 속에서 그 극적인 삶만큼이나 강렬한 사진 때문에 신화가 된 인물이다. 1923년 미국 뉴욕의 부유한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나 근심걱정 없이 자란 그가 기형인과 장애인들을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두 사람이 큰 영향을 미쳤다. 남편인 앨런 아버스, 그리고 스승인 리제트 모델이다. 첫 번째로 다이안 아버스에게 사진가로서의 싹을 틔워준 남편 앨런 아버스는 4년 간의 열애를 거쳐 18세의 어린 아내와 결혼을 감행하면서 아내에게 사진을 권유했고, 두 사람은 함께 패션사진계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다이안 아버스는 10여 년 간을 패션사진가로 활동하면서 그 화려하지만 공허한 세계에 질려버리고 만다. 철저히 연출된 이미지의 사람들을 찍는 일은 그에게 어떤 감동도 주지 못했다. 새롭고 진실한 피사체를 찾아 헤매던 아버스가 찾아낸 새로운 스승, 리제트 모델과의 만남은 그의 삶에서 두 번째의 전환점이 됐다. 1930년대 말부터 극빈층과 기형인 등 소외된 사람들을 찍어온 모델의 가르침은 아버스에게 작가로서 추구해야 할 정체성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줬다. 1955∼57년까지 모델에게 사사한 아버스는 패션사진계에서 완전히 떠나면서 1962년 남편과도 이혼을 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대칭구도 속에 담은 기형인들의 삶 
부유하게 자라 ‘밑바닥 인생’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던 다이안 아버스는 그 반대급부로써 소외계층, 그 중에서도 장애인이나 기형인처럼 평생 남과 다른 징표를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었다. 섬뜩할 만큼 중립적인 눈으로 피사체를 사진 속에 담으면서 그가 내심 느꼈을 마음의 충격은 관람자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그렇다고 해서 선정적인 소재주의에 빠졌다기보다는, 평범하지 못한 운명을 타고난 이들이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내는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다는 쪽이 더 적합한 해석이 될 것이다. 아버스는 자신이 기형적인 인물들을 찍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그들은 내게 수치심과 경외심이 결합된 감정을 준다. 대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 심리적 외상을 입지만, 기형인들은 이미 그러한 ‘인생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삶을 초월한 고귀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가 즐겨 쓴 좌우대칭구도는 안정감을 주는 대표적인 구도지만, 그보다는 보이지 않는 운명 앞에서 경직되고 수동적인 피사체의 모습을 강조하는데 쓰였다. 정면을 바라보고 차렷 자세로 찍는 기념사진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온 사진, 기묘한 느낌을 더욱 강화시키는 짝패의 등장 등 전형적인 구도로 요약되는 그의 사진은 때로 평범한 사람들마저 기이하게 만들어버린다. 예컨대 아이다운 귀여움을 보여주는 대신 굳게 다문 입과 그뤼네발트 제단화의 예수처럼 손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린 ‘장난감 수류탄을 든 어린이’(1962)라던가, 느닷없이 터진 플래시 불빛 아래 눈을 위로 치켜 뜬 ‘성조기를 들고 있는 애국청년’(1967)의 모습이 그러하다.

1963년과 66년 두 차례나 구겐하임재단의 예술기금을 받고 파슨스 디자인스쿨에서 강의를 맡는 등 작품 세계는 주목을 받았지만 다이안 아버스는 평생 개인전 한번 열어보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자기 세계를 파고든지 불과 10여 년만인 1971년 자신의 손목을 그어 자살로 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지병처럼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불안과 혼돈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카메라를 잡고 불우한 운명의 힘을 찍었던 아버스의 손도 끝내 그 자신에게 부여된 삶을 초월해 ‘인생의 시험’을 통과하는데 도움을 주진 못했다. 그럼에도 인간의 모습을 유형학적으로 접근한 19세기 다큐멘터리 초상사진의 전통을 계승한 그의 사진만큼은 잊혀지지 않는 원체험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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