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삼촌’ 유재선의 작업실은 내가 꿈꾸던 이상향과 꼭 닮았다. 한적한 주택가라 소음에 시달릴 염려가 없고, 정오께 작업실로 출근해 셔터를 올리면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곤 밥을 졸라대는 길고양이까지 있으니, 고양이 작가의 작업실로는 더 바랄 게 없다. 여섯 살배기 고양이 제이와 단둘이 사는 작가는 고즈넉한 작업실 한켠에서 고양이 그림을 그리고, 고양이 쿠션도 만든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생업으로 삼고 있지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그를 일러스트레이터로만 규정하기엔 좀 서운하다. 그는 유리창에 마커로 그림을 그리는 윈도우 페인팅 작가로도 유명하고, 빈티지 인형을 파는 인형가게 사장님이자, 그림동화책과 잡지를 수집하는 고서점 주인이기도 하다. 그간의 작품을 모은 포트폴리오 격인 《고양이 삼촌》(레프트로드)도 펴냈다. 하드보드 표지를 손으로 일일이 붙여 만든 수작업 소량생산 책이다. 그렇듯 다양한 작가의 관심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곳, 일과 재미가 하나로 된 공간이 바로 유재선의 작업실이다. 

유재선은 작업실을 반으로 나눠, 수집품 전시 공간 겸 작업 공간으로 활용한다. 통유리창 너머로 언뜻 보이는 방이 전시 공간 쪽이다. 손때 묻은 빈티지 인형, 장정이 예쁜 그림책, 오래된 영화 속에서 슬쩍 꺼내온 듯한 빈티지 소품들…. 그동안 정성껏 모아온 오래된 보물들이 가득하다. 처음 작업실을 열었을 때, 동네 사람들은 ‘웬 총각이 인형 가게를 차렸나’ 했단다. 심지어 골동품 가게인가 묻는 사람도 있었다.


남들 눈에는 유행 지난 구닥다리로 보이거나 특이한 물건으로 치부될지라도, 그에게 소중한 이유가 있다. 그가 만드는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작업하기 전에는 항상 모아뒀던 옛날 잡지를 펼쳐본다. 특히 《라이프》지에는 지금 시각으로 봐도 신선한 광고들이 많아서 좋아한다. 몇 십 년 전에 나온 그림책이랑 동화책도 자주 본다. 오래된 것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유재선이 좋아하는 고양이에 빈티지 인형의 요소가 결합되어 탄생한 것이 바로 고양이 쿠션이다. 고양이를 의인화한 복고풍 캐릭터를 그리고, 그들의 손에 빈티지 인형과 소품을 쥐어줬다. 오뚜기 인형을 안은 고양이 소녀, 복고풍 뿔테안경에 헐렁한 바지를 입은 1970년대 올드스쿨 스타일의 고양이 소년이 하나둘 만들어졌다.


고양이 쿠션은 연필로 밑그림을 그린 다음 스캔을 받아서 타블렛으로 작업하고, 필름을 떠서 실크스크린 판을 만든 다음 수작업으로 찍어낸다. 타블렛으로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뿐 아니라,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 천을 재단한 다음 쿠션 솜을 채워 넣는 작업까지 이 방에서 모두 이뤄진다. 일손이 바쁠 때면, 가끔은 누나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고양이 쿠션은 1차 10종 세트로 완성됐다. 앞으로도 새로운 버전의 고양이 쿠션을 꾸준히 만들어갈 예정이다.


작업대 앞에 놓인 붓과 그림 도구들 사이로 함께 사는 고양이 제이의 그림이 보인다. 작가 이름인 ‘재선’에서 영문 맨 첫 글자인 J를 따서 지어준 이름이다. 대학교 4학년 졸업 시즌인 2003년, 수원에서 자취하면서 10평짜리 오피스텔에 살던 무렵 처음 제이를 데려왔다.

“제이가 처음 저에게 왔을 때는 3개월 된 아기 고양이였어요. 졸업 시즌에 맞춰서 서울로 오려고 방을 내놓았는데, 제가 없을 때 복덕방에서 사람들에게 집을 보여주려고 문을 열었다가 고양이를 보고 놀란 거죠. 고양이가 있어서 집이 싫다는 사람, 문 열어보고 무섭다며 바로 나간 사람도 있었대요. 복덕방에서 ‘고양이 때문에 집이 안 나가는데 어쩔 거냐’고 저희 집에 전화하는 바람에, 고양이 버리라고 난리가 났어요. 지금은 이사를 자주 안하니까 그럴 일은 없는데, 그때는 고양이를 키우는 것 때문에 집에서 반대가 컸죠. ”


한번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니, 유럽 여행을 가서도 다른 사람이 풍경 사진 찍을 때 그는 길고양이에게만 눈길이 갔다. 그래서 찍어온 사진들을 뒤져 보면 온통 고양이 사진뿐이다. 이른바 ‘유럽 고양이 여행’을 하고 온 셈이다. 어린 조카는 고양이를 유달리 좋아하는 삼촌에게 ‘고양이 삼촌’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제가 유전적으로 천식이 있는데, 그래도 견딜 만해요. 털만 날리지 않으면 좋겠지만… 제이는 친칠라 종이라 털 색깔이 참 예뻐요. 저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차갑고 까칠하게 대하는데, 친구들이 안아보고 싶어 해도 너무 낯을 가려서 안타깝죠. 하지만 저는 제이가 저만 알아봐주고 다정하게 대하는 게 오히려 매력으로 느껴져요.” 


작가만 유독 따르는 고양이라서, 2009년 5월경 이곳에 작업실을 얻고 나서 제일 신경이 쓰였던 것도 제이였다. 그전까지는 집에서 하루 종일 함께 있곤 했는데, 이젠 오전 11시~정오 사이에 집을 나와 자정께 들어가니 반나절을 혼자 있을 제이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집도 일부러 작업실과 가까운 곳으로 구했다. 걸어서 10여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여서, 짬짬이 제이랑 놀아주고 다시 작업실로 돌아온다. 


고양이가 없는 동안의 아쉬움은 작업실 근처 길고양이가 채워준다. 작업실로 놀러오는 길고양이는 모두 3마리. 작년 겨울부터 하얀 고양이가 안 보이기 시작해 걱정이란다. 나머지 2마리 중에 1마리는 매일 출근도장을 찍다하다시피 한다. 그 고양이에겐 ‘나비’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중성화 수술을 했다는 표시로 한쪽 귀가 살짝 커팅된 것을 보면, 누군가 근처에 돌보는 사람이 있는 길고양이인 모양이다.

누구나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고양이 문구를 구상 중인 유재선의 또 다른 꿈이 있다. 대중적인 디자인문구 작업과 더불어, 마음대로 그려나갈 수 있는 순수회화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이루고 싶은 꿈이다.


“제가 그린 고양이 캐릭터도 지금처럼 선적인 요소만 있으면 그냥 일러스트지만, 이걸 회화적으로 풀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장난감 종류에 고양이 그림을 접목시킬 건데, 이를테면 오뚜기 인형과 고양이를 100호짜리 캔버스에 그리는 거죠. 그림에 들어가는 소품이나 패턴에 빈티지 요소를 접목시켜서 재미있는 회화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날, 유재선의 작업실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미키마우스처럼 귀가 둥그런 모자를 쓴 고양이 쿠션이다. 작가가 정성스레 포장해준 비닐을 벗기고, 쿠션을 품에 안아본다. 볕이 잘 드는 작업실 창가를 오래 지키느라 쌓인 먼지 냄새, 햇빛 냄새가 난다. 꼭 고양이 한 마리만큼의 따뜻함과 포근함이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진짜 고양이를 품에 안은 것 같았다. 그 쿠션이 현실의 고양이와 비슷한 부피를 지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속에는 한 남자가 고양이와 함께 해온 6년의 시간이 스며 있으니까. 나는 그 추억의 따스함을 포옹한 것이다.

* 작가 홈페이지(www.jaesun-shop.com)를 궁금해하는 분이 계서서 정보를 추가합니다.
  쿠션은 수작업으로 그때그때 만드는 거라,  주문하시고 며칠 뒤에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술가의 고양이2] 일러스트레이터 마리캣 인터뷰

“달력 80부만 찍고 싶은데요….” 골목 따라 빼곡하게 들어선 인쇄소를 기웃기웃하던 대학생이 어렵게 입을 연다. 하지만 고작 80부란 말에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에 눈물을 삼키며 충무로 인쇄골목을 전전했던 10년 전 그 대학생은, 이제 고양이 달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 ‘마리캣’으로 살고 있다. 매년 출시되는 마리캣 달력과 다이어리를 모으는 마니아층도 생겨났다.

대학생이었던 2000년부터 고양이를 그리기 시작했으니, 고양이 작가로 나선 것도 올해로 10년째. 대학생 때 중세의 채색 필사본을 보며 섬세한 장식 문양에 매료되었고, 그 문양들은 마리캣의 고양이 그림 속에 하나둘씩 새겨졌다. 동남아시아와 이슬람권 미술에도 관심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동양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느낌이 그림 속에 배어난다. 여행을 다니며 구입한 수집품이나, 현지에서 스케치한 풍경을 보며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마리캣의 출근 시간은 달랑 1초. 침실 문을 열고 세 발짝 걸으면 작업실이다. 침실이 바로 옆에 있지만, 작업실에도 접이식 침대를 따로 두고, 일이 많으면 거기서 쪽잠을 잔다. 집에서 작업실을 운영할 경우 느슨해지기 쉬워, 일부러 작업실과 생활공간을 엄격하게 나눈다.

10년을 내리 고양이 그림만 그렸으니 이제 ‘고양이 그림의 달인, 마리캣 선생’이라 불러도 될 법한데, 그는 손사래를 친다. 아직도 자기 그림을 보면 너무 시원찮아 보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단다. 그래서 본격적인 작품을 하지 않을 때도 틈틈이 손을 풀기 위한 그림을 그린다. 고양이의 역동적인 동세나 특유의 표정 같은, 늘 손이 기억해야 하는 그림들이다.



그가 직접 만든 이면지 크로키북 한쪽 면에는 영어교재가 프린트되어 있다. 크로키북을 사다 쓰면 될 텐데 왜 번거롭게 이면지로 만드는지 물었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란다. 이유 치고는 좀 거창하지만, 그는 당연하다는 얼굴이다. 아마존 삼림에서 베어지는 나무를 생각하면, 종이부터 아껴야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색연필도 손톱만큼 작아질 때까지 깍지에 끼워 쓴다. 앙증맞은 꼬마 색연필 중에는 1cm가 간신히 넘을 만큼 작은 것도 있다.

고양이 한 마리만 키워도 날리는 털이 만만치 않은데, 마리캣네 집에는 고양이가 다섯 마리다. 모두 길에서 데려온 업둥이들인데, 그중에서도 올해 11살이 된 첫째 마리에 대한 애착이 가장 깊다. 마리캣이라는 닉네임도, 회사명인 마리캣그래픽스도 모두 마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마리캣은 마리를 ‘내 영혼의 고양이’라 부른다.

못생기고 엉뚱해서 더 사랑스런 고양이

“보고 있어도 자꾸 보고 싶어요. 진짜 이상하죠? 제가 봐도 참 못생겼는데, 무슨 짓을 해도 예쁜 거예요. 성격도 저랑 비슷해요. 예민하고, 신경질 많고, 꼬장꼬장하고.”

마리캣은 최근 1년간 거의 집밖에 나가본 적이 없다. 한때는 날개 달린 고양이의 모험을 그리는데 쓸 배경 자료를 찾아 베네치아로, 앙코르와트로 훌쩍 여행을 떠났지만, . 종교미술에 관심이 많아 중국 실크로드 석굴군을 여행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오래 집을 비워야 하는 해외여행 생각은 아예 접었다. 가끔 경기를 하거나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마리 걱정 때문이다.

“제일 무서운 건, 종이박스 같은 데 올라가 있다가 착지를 못하고 몸이 굳어서 그대로 툭, 떨어지는 거예요. 몇 번을 그래서 너무 놀랐어요. 뻣뻣하게 마비돼서 팔다리도 못 가누고, 그러다가도 멀쩡하게 일어나 돌아다니니…. 마리는 제가 없으면 불안해 해서, 항상 눈에 띄는 데 있어야 해요.”

사람으로 치면 80~90살 할머니뻘인 데다, 최근 친구들이 키우는 고양이가 여럿 세상을 떠난 탓에 더 불안하다. 병원에도 가봤지만, 노환으로 인한 기능장애 탓이라 고치기 어렵다 했다. 애가 타지만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마리와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하루도 떨어져 있기가 싫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렇게 몸이 춥대요. 몸 안으로부터 체온이 꺼져가니까, 얼어 죽을 것처럼 냉기가 돈다는 거예요. 그때 제가 없으면 얼마나 외롭고 무섭겠어요. 임종을 못 지키면 평생 한이 될 것 같아서 되도록 집에 있으려고 해요.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있어요. 고양이 나이로는 저만큼도 많이 산 거라고 하니까….”

고양이와 함께 나이를 먹는다는 것
언제나 작고 귀여운 존재로 곁에 남아있을 것만 같은 고양이들. 하지만 고양이도 나이를 먹는다. 인간보다 빨리 어른이 되고, 인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늙어간다. 고양이와 인간은 마치 속도가 다른 무빙벨트를 타고 움직이는 것 같다. 처음에는 고양이가 저만큼 뒤에서 따라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옆에 왔나 싶더니, 나보다 훌쩍 앞질러 가버린다. 인간이 아무리 달려도, 고양이가 늙어가는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다. 마리캣의 눈에는 마리의 나이가 읽힐까? 어떻게 고양이의 나이를 느낄 수 있을까? 

“젊은 애들은 앉아있으면 가슴이 매끈매끈해요. 근데 마리는 앉아있을 때 보면 가슴팍이 움푹하고 울퉁불퉁하거든요. 피부에 지방이나 근육도 없고 털도 푸석해졌죠. 사람도 나이 들면 다리가 가늘어진다고 하잖아요? 얘도 하체에 근육이 하나도 없어요. 배만 볼록하고, 엉덩이도 빈약하고. 전 마리를 보고 ‘아유, 못생긴 년’ 그래요. 그런데 전 마리가 웃기게 생겨서 좋고, 못생겨서 좋아요. 요즘은 늙으니까 응석이 심해져서 아기같이 굴어요. 쓰다듬어주면 팔을 뻗어 제 가슴에 탁 대는데 ‘이거 사람 아니야?’ 싶어요.”

마리캣네 작업실 고양이들은 다들 성격이 드센 편이다. 그래서 마리캣도 마음 고생, 몸 고생을 톡톡히 했다. 집에서 일어난 일을 사실대로 다 이야기하면 못 믿을 정도란다. 심지어 마리 때문에 얼굴 성형수술을 할 뻔한 적도 있다.
 
“한밤중에 누가 얼굴을 팍 때려서 일어나보니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예요. 마리가 제 얼굴에 도움닫기를 한 거죠. 인중이 대각선으로 찢어졌는데, 고양이가 얼굴 위로 뛰어갔다니까 의사가 믿질 못해요. 다행히 흉은 안 남았지만, 그밖에도 기절할 일이 많죠. 다른 집에서는 1년에 몇 번 일어나기도 힘든 일인데, 이놈의 고양이들은 힘이 너무 넘쳐서 힘들어요. 전 그냥 제 팔자가 세다 그래요.”

마리캣이 일하고 있으면, 고양이 시도는 의자 팔걸이에 네 다리로 아슬아슬하게 서 있거나 ‘여보게, 저승 갈 때 뭘 가지고 가지?’ 하는 것처럼 제 어깨를 앞발로 탁 짚곤 한다. 키가 큰 노마는 직접 두발로 서서 방문 손잡이를 열고 불쑥 들어와 놀래키는가하면, ‘노트북 전원을 빼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걸 아는지, 자꾸 콘센트를 뽑곤 한다. 유별난 성격의 고양이들과 함께한 세월 때문일까, 마리캣의 고양이 그림에서는 모델이 된 고양이의  생생한 개성이 묻어난다. 단순히 피사체로만 고양이를 보는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지난 1월에는 그간 그려온 그림들을 엄선해 12가지 주제로 묶은  작품집 <캣북>2도 펴냈다. 중세 필사본을 연상시키는 장식 문양 한가운데, 아메리칸 숏헤어 고양이 ‘보리’가 요염하게 누워 있다. 첫 다이어리였던 2004년도 <캣북>의 표지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캣북>의 표지그림은 그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흰색과 검정색 줄무늬의 대비가 강렬한 보리를 검붉은 바탕 위에 그리면서,  빨강과 검정색에 대한 무의식적인 애착을 깨달았다. 작가에게 있어 '나만의 색'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업을 10년쯤 하다 보니 변하는 부분이 있고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건, 보리를 그리며 얻은 ‘색깔에 대한 자각’이다. 


 ‘고양이 미술관’의 꿈
마리캣의 작업실 한 구석 진열장엔 해외여행을 다니며 틈틈이 모은 고양이 장식물이 가득하다. 일본의 여자아이 축제인 히나마츠리 때 장식하는 히나 인형을 고양이 모습으로 만든 것, 베네치아에서 사 온 고양이 마리오네트와 고양이 가면, 고양이로 만든 체스 말…고양이 마니아라면 군침을 삼킬 만한 소장품들이 빼곡하다. 이 소장품은 마리캣의 그림 속에 소품으로 종종 등장하곤 한다.

“제일 애착이 가는 물건이 베네치아에서 산 고양이 마리오네트인데요. 간판도 없고 장사할 마음도 별로 없는 것처럼 생긴 가게인데, 거기 전시된 인형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굉장해요. 베네치아가 《장화 신은 고양이》의 도시잖아요. 그러니까 고양이 기사도, 공주도 있고. 어린애만 한 크기의 고양이도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100만원이 넘는 게 많아요. 거의 보물이죠.” 
 

그가 10년 간 모은 고양이 기념품들이 너무 앙증맞고 귀여워, 박물관이라도 차리면 좋겠다 싶다. 부엉이 박물관, 닭 박물관, 나비 박물관도 있는 마당에, 고양이 박물관이 하나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이야기하니 마리캣도 맞장구를 친다.

“10년은 무척 짧은 시간이에요. 처음 그림 그릴 때 10년은 기본기를 닦아야지 생각하고, 10년이 지나면 되게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거예요. 20대에는 제 브랜드를 갖는 게 꿈이었죠. 이제 30대가 됐으니까 그림의 밀도를 좀 더 높여서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싶고, 40대에는 고양이미술관을 열고 싶고…. 그게 제 희망사항이에요.”
 
마리캣이 그린 그림과 소장품을 모아 고양이 미술관을 열면,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앞으로 10년은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그 시간의 무게만큼 탄탄한 밀도를 지니게 될 그림들을 기대하면서. 마리캣의 고양이 미술관에는 그간 선보여온 달력이나 다이어리처럼, 대중적인 물건에 담기 힘든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도 있을 것이다. 10년 후 어느 고양이 미술관에 걸려있을 그의 그림들을 모두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마리캣을 온전히 만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고양이 작가들의 인터뷰가 궁금하면, 아래 링크로 오세요^^

 

영화감독에겐 예술영화라는 타이틀이 찬사인 동시에 낙인이다. 예술영화라면 손사래부터 치는 투자자, 개봉에 난색을 표하는 극장주, 보나마나 어렵고 지루할 거라며 관심도 갖지 않는 관객들을 떠안고 걷는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러나 민병훈 감독은 현실을 달콤한 판타지로 포장해 팔아치우는 사기꾼보다, 우직한 싸움꾼이 되길 원한다. 영화의 절대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그의 고집은, 영화 <벌이 날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집요하고 무모한 삽질과 닮았다. 자신을 극한 상황까지 내몰 때조차, 삽 대신 카메라를 든 민병훈 감독의 ‘삽질’은 결코 무겁지 않다. “깃털처럼 가볍게, 머슴처럼 저돌적으로, 하지만 심각하진 않게.” 그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픈 삶의 태도는 그러하다.


민병훈 감독이 러시아 국립영화대학 졸업 작품으로 만든 첫 장편 <벌이 날다>(1998)는 그의 영화관뿐 아니라 세계관을 뚜렷하게 드러낸 작품이기에 주목할 만하다. 타지키스탄 고원 마을에서 현지 배우를 기용해 현지어로 찍은 영화는 다소 낯설지만, 그 속에서 감독의 메시지는 생생하다. 모든 과정을 흑백으로 찍고 다시 세피아 톤의 색을 입힌 화면은 마치 시계태엽을 거꾸로 감아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같은 효과가 우화 같은 이야기와 어우러져, 영화 속으로 더욱 몰입하게 된다. 


두려움과 구원은 종이 한 장 차이

<벌이 날다>의 주인공 아노르는 초등학교 교사이자 작가지만, 내기로 한 책은 언제 출간될지 알 수 없고 살림은 늘 쪼들린다. 게다가 옆집 부자는 아노르의 집 담 아래 재래식 화장실을 만들어 수시로 드나들며 아노르의 아내를 훔쳐본다. 아노르는 부자에게 항의해 보지만 묵살된다. 억울한 처지를 하소연하면 도와줄 거라 믿었던 검사마저 “사유재산법도 모르느냐”며 부자 편을 든다. 결국 아노르는 가난한 자의 소소한 행복권마저 지켜주지 못하는 법과 전쟁을 선포한다. 즉 검사의 옆집을 사서 앞마당에 공동화장실용 구덩이를 파면서, 부자 이웃이 자신에게 했던 짓을 검사에게 고스란히 되갚는 것이다. 


아노르가 집요하게 파내려가는 구덩이가 깊어질수록 상황은 점점 파국을 향해 치닫지만, 삽질을 멈출 수는 없다. 무기력한 지식인이었던 아노르는, 삽질이라는 육체적 고행을 통해 일그러진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검사가 아노르의 아들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협상 카드로 제시할 때조차 단호히 타협을 거부한다.


아들의 자유를 포기한 대신 상처뿐인 싸움을 선택한 아노르는 절망과 고통의 깊이만큼 구덩이를 파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기적과 직면한다. 그가 판 구덩이에서, 200년 동안 우물 하나 없던 마을에 처음으로 우물물이 솟아나온 것이다. 무덤이 생명의 공간으로 반전되는 순간이다. 민병훈 감독은 삶의 가장 밑바닥까지 걸어 내려가야만 기적과 같은 순간을 대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구덩이와 무덤과 우물이 암시하는 상징은 명료하다.


주인공이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깨달음을 얻는 설정은 <괜찮아, 울지마>에도 등장한다. 허풍쟁이 청년 무하마트는 도박 빚을 지고 고향으로 도망가지만, 그곳에서도 천성을 버리지 못하고 성공한 음악가 행세를 한다. 거짓된 삶으로 일관하다 고향 사람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무하마트는, 돌산을 깨어 집을 짓는 할아버지를 구슬려 돈을 타내고 고향을 뜨려다가 놀라운 비밀을 깨닫는다.

좀 더 원만한 상황을 선택할 수 있을 상황에서도, 민병훈 영화의 주인공들은 유독 극단을 향해 내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극단을 향한다는 것, 끝을 본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민병훈 감독은 어떻게 두려움을 보여주면서도 구원을 말하는 것일까? 그에게 두려움과 구원은 어떤 의미일까?


“<벌이 날다>에서 아노르의 아들이 이런 ‘그만 파도 되지 않느냐’고 얘기하죠. 하지만 아노르는 ‘끝까지 더 팔 거다’라고 하면서 집요하게 더 파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나 자신을 불사를 정도로 극한까지 몰고 가야 결국 두려움의 실체와 직면할 수 있어요. 그때 바로 구원이 찾아온다고 봐요. 사실 두려움과 구원은 종이 한 장 차이거든요. 그러니 제 영화는 ‘두려움에 대한 3부작’인 동시에, ‘구원에 관한 3부작’이기도 하죠.”

두려움 3부작의 완결판격인 <포도나무를 베어라>에서는 두려움을 넘어선 구원의 메시지가 한층 더 명료해진다. 신학도인 수현은 옛 애인이었던 수아와 견습 수녀 헬레나 사이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용서하고, 또 용서받는다.


모조품 아닌 ‘진짜’를 찍고 싶은 열망

극한 상황에 몰리는 건 영화 속 주인공뿐만이 아니다. 척박한 영화판에서 예술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날마다 현실과 싸우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민병훈 감독은 제작비를 줄이기 위한 편법을 쓰지 않는다. 머릿속에 그렸던 풍경을 온전히 재현하기 위해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로케이션을 감행한다.

예컨대 <괜찮아, 울지마>도 한국의 적당히 비슷한 시골 동네에서 한국 배우와 함께 찍었다면 제작비를 훨씬 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 감독은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절대 기준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란 말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길과 구덩이와 거대한 돌산조차 우직하게 만들어낸다. 세트 촬영은 거부하지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찍는 건 ‘날로 먹는 것’이라 믿기에, 감독의 시선을 담아 풍경을 새롭게 창조한다. 그의 영화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중간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세트 촬영, 정말 싫어해요. 그렇게 찍으면 몸은 편하겠죠. 하지만 그건 내 편의만을 위한 거예요. 모조품은 제가 더 잘 알아요. 하지만 진짜를 찍고 싶어요. 그래서 원하는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다 보니 ‘감독님, 안돼요’란 말을 지겹게 들었어요.

<포도나무를 베어라>에 나오는 수도원도 2년 동안 쫓아다니면서 허락을 구해 찍은 거예요. 처음엔 다들 거절하죠. 다른 데도 많은데 왜 꼭 여기여야 되냐고 물어요. 그건 제가 어떤 여자와 결혼하려는데, 그 여자가 ‘나랑 비슷한 사람 많잖아. 왜 나랑 해야 해?’ 하고 묻는 것과 비슷해요. 당신이니까, 바로 그 장소니까 하는 거예요.”


7년간의 러시아 유학 기간 동안 그는 동양에서 온 낯선 이방인이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충무로 바닥에서 밑바닥부터 올라온 감독이 아니기에 열외자 취급을 받았다. 자본주의의 논리로 도배된 멀티플렉스 극장가에서도 그가 만든 예술영화는 소외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연덕스런 얼굴로 “영원한 이방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 짧은 말 속에 지난한 그간의 삶이 축약되어 있다.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줄곧 이방인이었으므로. 하지만 힘겨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겁지 않다. 감독이라며 무게 잡다가 조로하기보다, 차라리 머슴처럼 느물느물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던지면서, 관객들이 생각할 여지를 남길 수 있는 ‘열린 구조’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보편성을 띤 무국적 영화를 향한 꿈

민병훈 감독이 지향하는 것은 국가의 색을 넘어선 ‘무국적 영화’다. 오리엔털리즘에 기대기보다 경계를 초월한 보편성을 띤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말은 임권택 할아버지 때나 통할 얘기에요. 사실 그게 껍데기만 보는 거거든요. 그 껍데기를 빼내야 온전한 실체가 남는다고 생각해요. 전 태극기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제일 이상해요. 이제 제발 국가는 그만 좀 사랑하고, 개인을 사랑하자고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게 애써 만든 영화도 사람들과 공유하지 못한다면 허사가 되고 만다. 그는 예술영화의 제작 지원보다 중요한 건 접근성을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애꿎은 예산 들여 예술영화전문관을 지어서 오히려 예술영화를 고립시키지 말고, 시내 멀티플렉스 영화관마다 한 관만이라도 다양성을 담보한 영화를 지속적으로 걸어준다면 바랄 게 없다.


“지금 준비하는 작품은 향기에 관한 영화에요. 이제 구원을 뛰어넘어 사람의 향기가 묻어나는, 신의 향기로 소통되는 영화인 거죠.”


‘향기에 관한 3부작’을 준비 중이라는 민병훈 감독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어쨌든’이라는 단표현을 자주 썼다. DVD에 딸린 코멘터리에서도 그랬던 기억이 나기에 감독에게 물었다. 혹시 자신의 입버릇을 인식하는지, 그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는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긍정적인 인간이거든요. 고생을 많이 했는데도, 딱 보면 고생한 사람 같지 않대요. 편해 보인다고들 하니까요. 아마 그 말을 무의식중에 쓴다면 ‘괜찮지 않아요?’ 정도의 뜻이 아닐까요?”

내가 보기에 그의 ‘어쨌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뜻인 것 같다. 고집스럽고 우직하게 예술영화를 만들어가는 그의 태도처럼. 두렵지만 끝까지 가보려는 진심이 느껴지기에, 그의 영화를 한 번 더 애틋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민병훈 | 영화감독. 1969년 출생. 러시아 국립영화대학에서 촬영 전공으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잠셰드 우스마노프 감독과 공동연출한 첫 장편 데뷔작 <벌이 날다>(1998)을 비롯해 <괜찮아, 울지마>(2001), <포도나무를 베어라>(2006)로 이어지는 '두려움 3부작'을 완성했다. <벌이 날다>로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영화제 대상-비평가상-관객상, 그리스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 은상(1998) 등을, <괜찮아 울지마>로 체코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특별언급상-비평가상 등을 수상했다. 최근작인 <포도나무를 베어라>로 부산국제영화제 PPP코닥상(2004)을 받았다. 현재 한서대학교 영상예술학과 교수로 있다.

[문화와 나/ 2007 여름호] 단원들이 모두 떠난 연습실은 적막했다. 누군가 벗어두고 간 토슈즈 한 켤레만 텅 빈 연습실을 지켰다. 동그란 토슈즈 끝은 고작 3cm쯤 될까? 발레리나 김주원(29)은 그 3cm의 지구 위에 몸을 곧게 세우고 춤을 춘다. 발꿈치를 들어 톡, 토슈즈 끝으로 서는 동작은 일견 단순하지만, 이는 김주원이 자신의 몸에 봉인했던 수많은 자아 중 하나를 지금 곧 해방시킬 것이라는 신호다. 마침내 신중히 골라낸 캐릭터를 얇고 가녀린 육체에 덧입는 순간, 김주원은 사라지고 ‘배역 속의 그녀’만 남는다.

죽어서도 연인을 지키려는 지고지순한 지젤, 남자를 농락하는 농염한 여인 카르멘, 운명과 싸우는 스파르타쿠스의 아내 프리기아…. 199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해적>의 여주인공 메도라 역으로 데뷔한 이래, 김주원이 연기한 여성상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데뷔 10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에는, 그의 무대 인생 중 처음으로 한국 무용에도 도전했다. 지난 2월에 열린 안무가 국수호의 창작 무용극 <思悼-사도세자 이야기>에서 혜경궁 홍씨 역할을 맡은 것이다. 현대 무용가, 한국 무용가, 발레리나 등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해온 예술가들이 장르를 초월해 열연한 이 공연에서, 그는 토슈즈를 벗고 맨발로 춤을 췄다. 익숙한 발레의 움직임에 한국적인 색채를 덧입혀 새로운 인물을 창출해낸 것이다.

“무대에 서면 표정 하나, 손짓 하나에도 제 생각과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늘 새로운 배움이 중요한데, 정작 한국 춤에 대한 경험은 부족했죠. 무대에서 한국적인 색채를 몸으로 표현하는 느낌을 꼭 경험해 보고 싶었어요.” 

서정성으로 승화시킨 한(恨)의 정서 
1992년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에 입학해 6년간 해외 생활을 했고, 199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후에는 발레에만 몰두했던 그이기에, 한국 무용에 도전했던 이번 공연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특히 지아비와 생이별하는 여인의 처절한 슬픔을 무언극처럼 풀어내면서, 비로소 ‘한(恨)’의 정서를 오롯이 이끌어낼 수 있었기에 무엇보다 뜻 깊다. 김주원은 이 공연에서, 한국 고유의 정서를 자신의 내면으로 체화하는 일에 천착한 듯하다.

이는 단순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낡은 명제를 답습한 것이 아니다. 2006년 4월, 그가 발레 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최고 여성무용수로 선정되었을 때, 김주원을 높이 평가한 사람들 역시 그의 춤사위에서 묻어나는 한국적 서정성에 높은 점수를 줬다. 

“한이라는 정서에는 한국인만이 지닌 무척 독특한 색깔이 배어 있어요. 외국 사람들은 제 춤을 가리켜 ‘대단히 서정적이고, 섬세하고, 깊은 느낌이 묻어 있다’라고 말하지만, 그 역시 제가 한국 사람이기에 그런 인상을 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주원은 서구인 중심의 발레 무대에서 태생적으로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동양인으로서의 핸디캡을 장점으로 승화시킨다. 이는 엄격한 훈련을 거쳐 신체적인 악조건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생히 드러난다. ‘가장 아름다운 상체 라인을 지닌 발레리나’라는 찬사를 받는 그이지만, 이 역시 타고난 것이 아니다. 매일 아침 9시 반부터 12시간 가까이 반복되는 연습으로 만들어진 몸이다. 흔히 ‘뼈를 깎는 고통’이란 말을 하지만, 발레리나에게는 ‘뼈와 근육의 모양을 바꾸는 고통’인 셈이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무대에서 아름다워 보이는 몸의 라인을 만들고 또 유지할 수 있다.

혹독한 연습으로 만든 ‘가장 아름다운 상체 라인’ 
“일반적인 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비정상적으로 보여도, 무대에서 예뻐 보이는 몸의 라인이 있어요. 무릎이 많이 들어가고, 발등의 아치가 높고….하지만 전 그런 신체 조건을 타고나지 못했어요. 기형적으로 뒷목 뼈가 튀어나오고, 목도 너무 길고, 팔꿈치와 어깨뼈가 도드라져서 각이 져 보이거든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연습을 거듭한 덕분에 그런 결점도 오히려 아름답게 보인다니 감사할 뿐이에요.” 

김주원에게는 휴가라는 단어가 없다. 근육 끝까지 섬세한 움직임이 전달되어야 하는데, 유난히 뻣뻣한 근육 탓에 하루만 쉬어도 다음 날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휴가 기간이 주어져도, 그동안 연습하느라 제대로 못 받은 물리치료를 꼼꼼하게 받고 혼자 연습실에서 여유 있게 연습하는 데 쓴다. 그렇듯 고된 노력 끝에 만들어진 그의 몸은 얇고 가늘고 섬세하다. 유난히 긴 목 아래 도드라진 쇄골이 목걸이처럼 빛나고, 쇄골에서 어깨뼈로, 다시 팔꿈치에서 팔목으로 이어지는 몸의 굴곡은 봄 언덕처럼 부드럽다. 잔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게 듬성듬성 실핀을 꽂고, 색 고무줄로 아무렇게나 동여맨 머리카락도, 마치 고운 비녀로 쪽진 것 같은 단아함이 배어난다.

이런 경험이 있기에, 그는 발레리나가 타고난 재능보다 체계적인 연습과 시의적절한 훈련으로 완성되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렇기에 한국에 제대로 된 발레학교 하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에서 발레를 하려면, 예중과 예고를 거쳐 대학을 졸업해야 비로소 발레단에 입단하게 된다. 이런 천편일률적인 과정을 답습해서는, 프로 무용수를 육성하는 교육을 제때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발레가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발레단 산하에 발레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그가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 땅의 발레를 위하여
“무용수로서 왕성한 에너지와 기량을 갈고 닦아나가야 할 시기가 18세, 19세 무렵이거든요. 그런데 프로 무용수 한 명이 만들어지는 9, 10년의 기간 동안 필요한 체계적인 교육 제도가 한국에는 없어요. 그래서 심지어 발레단에 들어와서도 똑같은 스타일의 춤만 익히다가 무용수로서의 인생이 끝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저는 운이 좋았죠. 그 시기에 볼쇼이 발레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으니까요.”

1년에 100회 이상 무대에 서는 국립발레단 무용수로 활동해온 지난 10년 간 매너리즘에 빠질 때도 있었고, 해외 진출 권유도 종종 받았다. 하지만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 고국의 관객과 교감하는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그는 선뜻 고국을 떠날 수 없다. 오늘의 ‘발레리나 김주원’이 있게끔 해준 사람들이 바로 한국 각지에 숨은 발레 애호가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주원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해외 무대에 서기보다, 우리 땅 곳곳에 숨은 발레 팬을 찾아 떠나는 국내 공연을 더 소중히 여긴다. 공연 문화의 오지인 해남 땅끝마을에서 열리는 공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 5월 여수시민회관에서 열린 국립발레단의 대중 발레 프로그램 ‘해설이 있는 발레’에 공연자 아닌 진행자로 나선 것도, 일반 대중 속으로 스며드는 공연을 지향하고 싶은 소박한 꿈이 담겨 있다.

김주원은 연습실과 집, 공연장을 단조롭게 오가는 생활 속에서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새로운 자극을 일상 속에서 찾는다. 부상과 바쁜 공연 일정 탓에 휴학했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도 올해 복학했다.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어린 후배들과 동기생이 되어 공부하지만, 늦깎이 학생의 삶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쉬지 않는 배움이 자신을 키운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저보고 ‘호기심 천국’이라고 그러는데요, 궁금한 건 꼭 알아야 되고, 모르는 건 부끄러워하지 않고 잘 물어보거든요. 영화나 책 보는 것, 음악 듣는 것도 좋아하고…. 제 춤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뭔가 대단하고 투자하고 배워서 얻는 게 아니라, 제가 바라보는 것들 생각하는 것들, 또 말하는 것 하나하나…그런 일상 속에서 얻어지는 것 같아요.

프로 데뷔 10주년을 축하하는 주변 사람들의 인사에도, 김주원은 “지금껏 춤추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 10주년이라는 햇수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어떤 역할을 맡았을 때도 무대에서 관객들과 호흡하며 춤추는 시간 자체가 모두 자신에게 성장의 동력이 되어 주었기에, 10년의 세월 동안 맡았던 배역 중 특별히 애착이 가는 역할을 꼽기도 어렵단다. 제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배역이나, 삶의 전환점이 된 무대를 꼭 짚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무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에게도 역할 모델이 되어준 사람은 있다. 1960~7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발레리나, 나탈리아 마카로바다.

그림자에도 표정을 담는 프리마돈나  
“나탈리아 마카로바는 태생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무용수지만, 그 이전에 손가락의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 눈빛 하나까지도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영혼까지 불어넣은 듯한 느낌이에요.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제게는 모두 감동이었어요.”
평소 무대에서는 근육의 움직임 하나, 숨쉬는 동작 하나도 의미가 없으면 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던 그였기에, 마카로바의 공연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를 알 듯했다. 두 발을 곧추세우고 손가락을 살포시 하늘로 들어 올린 그의 모습을 다시 바라본다. 저 손끝은 어떤 단어를 몸짓으로 바꾼 것일까. 불상의 수인(手印)처럼 수많은 언어를 담은 손을 하늘로 향한 채, 그가 어둠 속에 서 있다. 무심한 손끝의 움직임, 어둠 속으로 흐려지는 그림자 속에도 표정이 있음을, 김주원의 춤 속에서 다시 본다.

김주원 | 1978년 부산 출생. 1992년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로 유학을 떠나 6년간의 교육 과정을 마치고 199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했다. 같은 해 <해적>의 메도라 역으로 국립발레단 최연소 주역을 따냈다. 한국발레협회상(2000)을 비롯해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동상(2001), 문화부장관상(2002), 한국발레협회상 프리마 발레리나상(2002), 제36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4), 제14회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여성무용수상(2006년)을 수상했다. 현재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 

'매일매일 재미있는 책 뉴스'를 표방하는 사이트 '북데일리'의 고아라 기자와 함께 동행 취재를 하고 그 과정을 시간 순에 따라 기록한 인터뷰 기사입니다. 아마 인터뷰하는 데 가장 많이 품을 팔아 쓴 기사인 듯... 저작권법 문제 상 기사 링크만 싣습니다.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