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포털 엔키노/2000. 9] 세상에 태어날 준비를 한지 6개월, 탄생을 알리는 울음소리 한번 내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둔 그대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그대의 어머니-페미니스트 그룹 `입김`이 그렇게도 허무하게 그대의 생명을 포기할 거였다면, 차라리 ○○화랑이나 △△아트센터처럼 그럴듯한 장소에서 제왕절개를 선택하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그대의 이름을 `아방궁 종묘점거 프로젝트`라 지었을 때부터 난산은 예견된 것이었지요. 5백년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는 종묘를 점거해서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을 듣고, 성균관 유림 할아버지들이나 이씨 종친회에서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대의 죽음을 전해듣고, 전시 내용이 어떠했기에 점잖은 분들이 `더러운 자궁` 운운하며 격분했는지 되짚어 보았습니다. 남녀의 생식기를 닮은 설탕과자를 모양대로 따먹는 행위를 통해 성적 속어에 담긴 언어폭력을 풍자하는 `뽑기 따먹기`, 금기의 말이 적힌 풍선을 터뜨리며 해방감을 느끼도록 한 `∼마라(should not)` 길 걷기, 명화 속 여성의 나체에 남성 저명인사의 얼굴사진을 합성하여 남성 위주의 관음적 시선을 조롱하는 `명화극장`, 권위의 상징인 각종 제복을 해체하며 가장무도회를 여는 `종로에 딴스홀을 허하라`, 여성의 자궁을 형상화한 작품을 통과하면서 상징적인 재생을 체험하는 `탄생체험 놀이` 등, 관람자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작업이 대부분이더군요.

이번 작업은 축제라는 형식을 통해 거부감을 줄이고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고는 하나 계몽적인 인상이 강했습니다. 원래 미술판 안에서의 놀이란 현학적일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비록 모든 전시내용이 관람자의 참여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이 놀이 속의 계몽대상이 바로 나다` 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즐겁게 그 놀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요. 게다가 이 프로젝트가 전복대상으로 삼은 가부장제를 삶의 기반으로 선택한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럴테구요.

어쨌거나 결과만을 놓고 봤을 때, 작품 훼손과 성적인 폭언으로 그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이 있고, 상징성을 내포한 예술행위가 천박한 해프닝으로 평가절하되는 현실은, 그대 죽음의 무게만큼 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하지만 이미 유사한 경험을 여러 번 치러 본 그대의 어머니라면 이런 결과를 충분히 예상했을 텐데, 그럼 이번 프로젝트의 목적은 전시파행 자체의 이슈화였을까요? 그렇다면 그대의 희생은 `페미니즘 미술의 순교`가 되는 건가요?

단순히 이번 전시의 파행을 예상하지 못한 경우라면, 그대의 어머니는 지나친 이상주의에 젖어있었던 거겠지요. 전시공간을 달리하고, 흥미를 끄는 화법을 도입하고, 참여계층을 폭넓게 잡는 것만으로는 일회적인 이벤트가 될 뿐입니다.

기왕에 종묘점거를 선언하고 나섰다면, 단순히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대중을 계몽하겠다고 떨쳐 일어선 몇 명의 전사`들에 의해 주도되는 행사가 아닌, 그대의 어머니가 만들고자하는 세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으는 자리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지지를 이번 자리에 이끌어내기까지는, 6개월 남짓한 출산준비 기간은 너무 짧았던 게 아닐까요.

아마도 그룹 `입김`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선정하기보다, 가부장제 아래서 실질적인 고통을 받아온 사람들-물론 그 범주 안에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포함됩니다-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잡아야 했을 겁니다. 예술작품이 관람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은 계몽이 아닌 공감 속에 있으니까요. 이분법적인 투쟁론만 내세우기보다는, 좀 더 전략적인 방법으로 접근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대의 죽음이 이번 사건의 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이번 행사와 관련해 다양한 색깔의 목소리가 울려나오고 있는 걸 보면 말이죠. 생산적인 논의를 통해 다음에는 보다 당찬 모습의 그대가 태어날 수 있기를, 다시는 이와 같은 희생이 재연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영화포털 엔키노/2000. 10 .30] 시청 쪽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 통로 벽에서 이상한 물체들을 발견했습니다. 붉은 벽돌 틈새에 끼어있는 투명한 아크릴 큐브들-호기심에 눈으로 하나하나 훑어보니 한 두개가 아닙니다. 큐브 안에 들어있는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크기의 인형들이며, 기괴한 방식으로 몸체가 짜깁기된 곤충들-아, 작가는 함진이군요. 1978년생이니 나이와 경력을 중시하는 미술판의 기준으로 본다면 아직 약병아리도 못되고, 이제 막 부화하려는 달걀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독특한 작업세계 때문에 주목받는 신진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함진의 작업은 일단 크기 면에서 관람자의 허를 찌릅니다. 초등학교 앞에 많이 있는 100원짜리 뽑기 기계 아시죠? 원형캡슐 안에 장난감로봇이며 반지 따위가 들어있는......딱 그 정도 크기의 작업을 합니다. 고물고물한 그의 인형작업을 보는 사람들의 첫 반응은 "야∼진짜 귀엽다. 어쩌면 이렇게 조그맣게 잘 만들었지?"지만, 그 다음 반응은 "어, 근데 얘네들 좀 엽기적이다..."입니다.

전시된 인형들을 한번 쭉 훑어보죠. 파리와 바퀴벌레를 자가용처럼 타고 다니는 나체의 아저씨들이나 머리카락으로 만든 집 속에서 쉬고 있는 손톱만한 종이인형은 그래도 애교스러운 축에 속합니다. 멸치 머리와 사람 몸통이 결합되면서 담배를 물고 있는 회사원이나 금발의 신부가 탄생하기도 하고,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곤충들의 사체를 이어붙여 만든 익룡은 앙증맞지만 한편으론 섬뜩합니다.


이번 전시 중에서 가장 엽기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순수하고 귀여운 이미지로만 인식돼온 만화캐릭터들의 재해석입니다. 두개골의 절반이 날아가 뇌와 안구가 노출된 미키마우스 인형이라던가 스트립 쇼를 하는 키티 인형, 게이인 곰돌이 푸가 애널섹스를 하는 모습이나 채찍을 들고 새도매저키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모습-이렇게 작품 전반이 성적 욕구와 파괴욕구라는, 대극적이며 원초적인 심상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인형들의 조그마한 몸 속에 구깃구깃 억눌려 있다 튀어나오는 비대한 욕망은 관람자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보통 만화 속 세계에선 천진난만하고 행복한 녀석들이 주인공인데, 함진의 인형은 이른바 `아픈 것`, `나쁜 것`, `아닌 것` 들을 다 담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디에나 고통이나 욕망은 존재하며, 그런 면들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만화보다 더 비현실적이라는 메시지가 느껴집니다.

함진 스스로 설명하는 제작 동기는 간단합니다. 집에 혼자 남아 이것저것 주물럭거리며 뭔가를 만들었던 자신의 자폐적인 성장기가 작업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죠. 벽의 구멍난 틈이나 방의 모서리 같은 구석진 곳을 찾아다니며 전시하는 방식이나, 그의 인형들처럼 작아지고자 하는 욕구는 상징적인 퇴행을 반영합니다. 그렇게 작아져서 어머니의 자궁 속과 같이 어둡고 따뜻한 방, 고통없는 안전한 세계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지요.


그러나 자폐적인 세계는 외부와의 관계를 부정해버리기 때문에, 그 안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은 결국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파국을 막기 위해 함진이 선택한 것은 자신 안에 있는 다양한 욕망들을 인형이라는 형태로 끄집어내며 외부와 소통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을 보호하던 껍질을 힘겹게 부수고 나오는 병아리의 모습은 핏물에 흠뻑 젖어있어 끔찍하기까지 하지요. 창작활동을 통해 자폐적인 세계의 껍질을 막 깨고 나오는 함진의 작업을 보면서 그 병아리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걸음은 아직 불안정하고 미래도 불투명하지만, 불확실함을 인정하는 건 곧 삶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니까요. 그가 자기만의 세계를 나와 다른 세계와 접촉하기 시작할 때, 그의 인형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영화포털 엔키노/2000. 9]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유형이 가지각색인 것처럼, 사람의 모습을 본뜬 인형에도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아마도 인형 안에 어떤 생각을 담으려고 했는지에 따라 그 인상이 달라지지 않나 생각됩니다만......완구점에서 흔히 보는 바비인형류는 `쭉쭉빵빵해야 진짜 여자`라는 메시지가 노골적으로 담겨있어 짜증스럽지만, 살다보면 때로는 가슴 설레게 하는 인형들도 만나게 됩니다.

제 경우에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 등장하는 죽음과 재생의 이미지가 담긴 인형극 장면이라던가, 인형 애니메이션인 <버림받은 자들의 밀실> 속의 마네킹 가족을 볼 때가 그런 때였지요. 처음 일본인형 전시회에 대한 안내메일을 받고 나서 꼭 가보리라 마음먹은 건, 제가 좋아하게 될지도 모를 또 하나의 인형을 만나러 간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전시장소인 주한 일본대사관 2층에 들어서면, 빨간 천을 씌운 나지막한 탁자 위의 인형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70점에 달하는 인형들을 모두 보여드릴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일본사회 속에서의 인형은 단순한 장식품이나 완구를 넘어,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일본에서는 등신대의 인형을 조종하면서 연기하는 인형극인 `분라쿠(文樂)`가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인형의 테마를 정할 때 `가부키(かぶき)`나 `노(のう)` 등의 이야기구조를 빌려오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건 어린이들을 위해 인형을 장식하는 풍습인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명절이 다릅니다. 먼저 3월 3일의 `히나마쯔리(ひなまつり)`를 볼까요? `모모노셋쿠`(もものせっく:복숭아 명절)이라고도 하는 이 날에는 여자아이의 건강과 장래의 행복을 비는 히나 인형을 전시합니다. 3월 3일이 지나서도 히나 인형들을 치우지 않으면 아이가 시집을 늦게 간다는 전설(?)도 전해지는군요. 히나 인형의 단은 1단부터 많게는 7단까지도 올릴 수 있지만, 이번에 전시된 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1단 부분으로, 금박병풍을 치고 일본 왕과 왕비를 앉힌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히나마쯔리가 여자아이들을 위한 인형명절이라면, 5월 5일 단오절(たんごのせっく)에는 남자아이가 무사처럼 강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기원하는 `5월 인형`을 장식합니다. 요즘은 5월 5일이 남녀공통의 어린이날인 탓에 이런 구별은 옛날보다는 좀 덜하지만요. 이 인형은 갑옷과 투구를 쓰고 완전무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흠......일본영화 <카게무샤>에 나오는 아저씨들의 전투복장과 비슷하지요?


이렇게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미를 자랑하는 일본인형이지만, 무척 단순한 모양의 `코케시(こけし) 인형`도 있습니다. 과거 일본의 빈곤층에서 노동력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여자아이들은 군식구로 여겨져 버림받거나, 방직공장 또는 사창가로 보내지곤 했는데, 이런 여자아이에 대한 기억의 증표로 만들어 간직한 것이 코케시 인형입니다. 전통 코케시 인형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되는 건, 그런 슬픈 역사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인 듯 합니다.


* 일본인형의 세계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분들께 드리는 팁 한 가지!
살아 움직이는 일본인형을 보고 싶다면, 카와모토 키하치로의 인형 애니메이션 <부조리 3부작>을 권합니다. 일본 전통극예술의 모티브를 인형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것인데, 무척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