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다음/ 2005. 6. 17] 19세기 초·중반 프랑스 파리 근교의 시골마을 바르비종을 근거지로 활동한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소박한 농민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8월 28일까지 이들의 그림을 소개하는 ‘밀레와 바르비종파 거장’ 전을 개최한다. 밀레, 코로를 비롯해 루소, 도비니, 트루아용, 디아즈, 뒤프레 등 총 31명의 작품 106점을 선보인 이번 전시는 평소 접하기 힘든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작품을 한데 아우른 대규모 기획전이다. 아울러 사실주의의 거장 쿠르베의 작품도 전시돼 눈길을 끈다.


 밀레의 '밭에서 돌아오는 길(1873)'. 석양을 등에 이고 돌아오는 부부의 모습이 부드러운 필치로 그려졌다.
 
19세기 초 프랑스.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 이름난 파리에서 불과 60km 떨어진 곳에 시골 마을 바르비종이 있었다. 파리와 가까우면서도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모습에 반한 화가들은 종종 바르비종 인근의 퐁텐블로 숲을 찾아 목가적인 풍광을 그림으로 남겼다.

기록에 따르면 1822년 카미유 코로가 퐁텐블로 숲에 들어와 유화 습작을 남겼다고도 하는데, 이 무렵만 해도 바르비종에는 여관이 없을 만큼 외부 왕래가 적었다. 그림을 그리다 숙박이라도 하려면 화가들은 퐁텐블로 숲에서 한 시간 거리의 다른 마을까지 무거운 짐을 이끌고 걸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1824년 바르비종 마을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던 프랑소와 칸느가 여관을 열면서 1830년대부터 칸느 여관을 거점으로 삼은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여관 주인 칸느는 수입이 변변치 않았던 화가에겐 여관비를 깎아주기도 하고, 밥값을 받지 않는 대신 벽이나 가구에 장식화를 그려달라며 화가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지원하곤 했다.

파리와 가까운 덕에 그림을 팔거나 전시하기 유리한 입지인데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시골 마을의 일상을 늘 접할 수 있고, 가난한 화가들을 지원해주는 여관 주인까지 등장하면서 바르비종은 자연스럽게 화가의 마을이 되어 갔다.

오늘날 바르비종파 화가의 대표로 손꼽히는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가 1849년 바르비종에 정착했을 때 칸느 여관에 화가 40명이 북적거릴 정도였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당시 ‘바르비종파 화가’란 이름보다 ‘칸느 여관의 화공’들로 불렸던 이들 화가들은 1872년에 이르러 바르비종 마을 인구 350여 명 중 100여 명을 차지할 만큼 번성했다. 활동 당시에는 특정 유파를 결성하지는 않았으나 이들은 유사한 화풍으로 인해 후대에 ‘바르비종파’ 화가로 불리기에 이른다.

 
특히 바르비종에서 27년을 머물며 농민의 일상을 화폭에 담아낸 밀레는 초기에 프랑스 부르주아 계층의 화려한 초상을 그리기도 했으나, 점차 농민의 삶에 매료되면서 힘겨운 노동을 영위해 가는 시골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감동을 준다.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자료와 상상에 의거해 그린 이상주의적 풍경화가 아닌 실제로 야외에 나가 그린 그림의 생동감 넘치는 힘을 보여주었다. 빛과 공기의 미묘한 어울림을 자유롭게 묘사한 이들의 그림은 미술사적으로는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이후 인상주의의 태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밀레가 1855~1860년경 그린 '우물에서 돌아오는 여자'는 1975년 파리에서 열린 ‘밀레 사후 100주년’ 전에 출품됐던 작품이다. 단단하게 묘사된 여인의 몸과 두 팔에서 강한 생명력이 넘쳐난다.

 


가장 뛰어난 프랑스 낭만주의 풍경화가로 평가받는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 1796~1875)의 1865~70년경 작 '데이지를 따는 여인들'. 치마폭 한가득 꽃을 따 안은 여인들은 아름다운 숲의 정경에 둘러싸여 더없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종교적, 역사적 내용을 배제하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충실히 재현한 코로의 작품. 현장성을 살린 풍경화의 가치를 주장했던 그의 그림은 후대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풍경화로 유명한 루소(Theodore Rousseau, 1812~1867)의 1850~60년경 작품. 루소는 1827년 퐁텐블로 숲의 풍경을 그렸고 1933년에는 바르비종 인근의 샤이이 마을에서 머무르며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미디어다음/ 2005. 6. 15] 최근 “종군위안부라는 말은 원래 없었다”는 나카야마 나리야키 일본 문부과학상의 망언이 불거지면서 일본의 역사 왜곡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서울역사박물관과 독립기념관 공동주최로 6월 19일까지 열리는 ‘2005년 거짓과 왜곡’전은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눈길을 끈다.

본 전시에서는 1872년 간행된 역사교과서 ‘관판사략(官版史略)’ 등 각종 교과서와 더불어, 독도 관련 지도 및 우표, 일제 강점기의 만행을 고발하는 유물 등을 선보였다. 군국주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된 1900년대 초반의 역사교과서부터, 극우세력이 만든 최근의 역사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왜곡 실태를 전시로 만나본다.
‘종군위안부’ 망언으로 물의를 빚은 나카야마 문부과학상은 현재 일본 역사교과서 검정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지난 3월에도 교과서 기술의 기준인 학습 지도요령에 독도가 일본 땅임을 분명히 써야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처럼 일본의 역사 왜곡은 아직 진행 중이다. 특히 1997년 1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결성과 더불어 2001년 후쇼사의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면서 이 같은 왜곡은 한층 심화되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고대 한국은 일본에 진상을 헌상하는 속국이었다”, “임진왜란은 일본인들의 해외발전심을 발휘한 것으로 침략이 아니다”, “러일전쟁은 청나라와 한국을 보전하고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전쟁이었고 그 승리는 일본을 세계 일등 강국으로 만들었다”는 등의 주장을 하고 있는 일본교과서를 만날 수 있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무료이며, 평일 오후 10시까지 심야개관을 실시하므로 직장인도 퇴근 후 여유롭게 관람 가능하다. 문의전화 02-724-0114.

 


일본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80척의 배를 거느린 일본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했다는 전설이 언급돼 있다. 이를 '심상소학국사부도(尋常小學國史附圖)’(1926)에서 삽화로 설명한 부분이다. 일본 황후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진상품을 바치는 왼편 하단의 사람이 신라 왕이다. '임나일본부’설을 강조하기 위해 신라와 백제 사이 회색으로 표시한 지역에 ‘임나’란 지명을 도드라지게 써 놓았다.


1872년 문부성이 편찬한 최초의 국정 역사교과서 ‘관판사략(官版史略)’은 신공왕후의 삼한 정벌을 기술하고 임진왜란을 미화하는 등 한국사 왜곡의 원형이 됐다. 오른쪽 상단의 ‘조선정벌’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다. 군국주의가 창궐한 당시 일본 역사교과서는 이처럼 삽화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삼한조공(三韓朝貢)’을 묘사한 또 다른 삽화다. 본문에서도 신라, 고려, 백제 등 국가 이름이 누차 언급되고 있다. 일본의 소학교 국사 교과서는 1904년부터 패망할 때까지 7차례에 걸쳐 7종 14권이 간행되었다. 일제 군국주의 침략과 맞물려 진행된 교과서 개정 과정은 군국주의 침략의 수단으로 교과서가 악용된 실례를 보여준다.

1997년 1월 창립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서 편찬한 역사 왜곡 도서들. 이 모임의 회장인 니시오 간지 교수는 "일본 역사교과서는 과거를 어둡게 보는 자학사관에 빠져 있다"며 일본 극우 세력의 시각을 철저히 반영한 '국민의 역사(國民の歷史)'를 편찬했다. 역사 왜곡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책을 펴내는 것도 대개 이들이다.











[미디어다음/ 2005. 6. 10]
1992년 외설 시비로 첨예한 논쟁을 빚었던 ‘즐거운 사라’의 마광수(54) 교수가 돌아왔다. 지난달에만 소설과 에세이집, 작가론 등 4권의 책을 펴냈고, 이달 초에는 서울신문 연재도 시작했다. 2003년 9월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복직한 뒤에도 한동안 칩거했던 모습을 볼 때 이처럼 활발한 활동은 이례적이다. 지난 1일부터 7일까지 서울 인사갤러리에서 열린 ‘이목일·마광수 2인전’에서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그림에 쏟아 부은 마 교수를 만났다.

마 교수의 공식적인 화력은 1991년 화가 이목일과 이두식, 소설가 이외수와 함께 연 ‘4인의 에로틱 아트전’(서울 나무갤러리)에서 시작된다. 1994년에는 서울 다도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올해 1월에는 거제문화예술회관 초대로 ‘이목일·마광수 2인전’을 연 바 있다.

이런 내력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마 교수의 그림은 외도로 보일 법하다. 그러나 대광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교지의 표지화와 삽화를 도맡기도 했던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소설을 쓰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즐거운 사라’ 사건 이후 십여 년간 칩거생활을 하며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내적 치유를 경험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마 교수의 그림을 보면 그가 느낀 욕망과 좌절, 배신감 등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을 향해 내뱉지 못했던 말들도, 그림을 통해서는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유명해진 ‘긴 손톱’에 대한 예찬을 비롯해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게 살고 싶은 마음, 현학적인 글쓰기와 봉건주의에 대한 비판 등이 가감 없이 실린 그의 그림은 ‘인간 마광수’의 꾸밈없는 면모를 보여준다.

한동안 자기검열에 시달리며 글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마 교수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간 억눌린 창작 욕구를 분출하듯 지난달에만 책 4권을 펴냈다. 직접 그린 삽화 40장을 실은 장편소설 ‘광마잡담’(해냄)과 철학 에세이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오늘의책)의 표지에서 그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이밖에도 에세이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해냄), 개정판 ‘윤동주 연구'(철학과현실사)를 펴냈지만 아직도 쌓아둔 미발표 글이 많아 올 한해 책 출간이 계속 이어질 것 같다고 했다. 아직은 독수리 타법이지만, 자신의 이름을 딴 홈페이지도 직접 운영하며 세상과의 접속을 시도하는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손톱을 길게 길러 열 손가락마다 서로 다른 매니큐어를 칠한 여자에게 가장 매력을 느낀다”는 마광수 교수는 가장 애착을 느낀다는 다색판화 ‘손톱 같은 단풍숲’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의 그림은 7월 6일~11일 대구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도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야한 사람’을 좋아하셔서 나 같은 남자한테도 여자처럼 치장할 권리를 주었죠. 그래서 나는 어느새 ‘탐미적 평화주의자’가 된 것이랍니다. 손톱이 짧으면 오히려 남을 할퀴게 되지요. 그렇지만 손톱이 길면 손톱이 부러지는 게 아까워서라도 남을 할퀴지 않게 되거든요.” (‘마광수의 섹스토리’ 중 아담의 말)


[미디어다음/ 2005. 5. 26]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서거 1주기 맞아 대규모 회고전 열려
현대사진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2004) 서거 1주기를 기리는 ‘찰나의 거장’전이 이달 21일부터 7월 1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다. 출품된 사진 수만 226점에 달하는 대규모 회고전으로,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을 논할 때 즐겨 인용되는 ‘결정적 순간’을 형상화한 사진 외에도 한 시대를 풍미한 저명인사와 예술가의 모습을 담은 인물사진, 보도사진가 집단 ‘매그넘(MAGNUM)’의 공동창립자로 세계를 누비며 격변하는 시대상을 담은 보도사진을 한데 아우른 ‘완결편’이라 할 만하다.
인도 카슈미르 스리나가르, 1948

언제나 부담 없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소형 라이카 카메라에 인간의 눈과 가장 가까운 화각을 가진 50mm 렌즈를 즐겨 썼던 카르티에-브레송. 그가 평생을 걸고 추구했던 ‘결정적 순간’의 사진은 단순히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한 사진을 의미하지 않는다.

피사체의 본질과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구도의 포착, 빛의 조건, 예기치 않게 등장한 대상물이 특정 순간 합일을 이룰 때 그의 사진은 비로소 완성된다. 그 사진 속에는 무한한 기다림 속에서 건져낸 찰나의 빛이 담겨 있다.

언뜻 보기엔 우연한 스냅사진 같은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에서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지는 것은 마치 오랜 수도 끝에 불현듯 깨달음을 얻듯 찍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도를 깨우칠 수 없는 것처럼 카르티에-브레송은 연출사진을 거부했으며, 인공조명을 사용하거나 주제를 강조하는 트리밍도 지양했다.

화려한 색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빛과 어둠의 대비만으로 대상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도록 흑백사진만을 고집하기도 했다. 이러한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관은 1952년 출간한 작품집의 영문판 제목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에 응축되어 나타난다.

어렸을 때 화가를 꿈꾸었던 카르티에-브레송은 예술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수많은 예술가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그가 촬영한 예술가들의 면면을 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피사체와 교감하면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움은 카르티에-브레송의 인물사진에 독특한 빛을 더한다.

점토조각을 어루만지는 자코메티, 애완용 비둘기와 함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마티스, 시가를 손에 든 마르셀 뒤샹, 조용히 한 점을 응시하는 만년의 샤갈, 방심한 상태로 손님을 맞이하는 파블로 피카소의 모습은 20세기 현대미술사를 인물사진으로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하다.

예술가 외에도 특유의 ‘살인 미소’를 날리는 체 게바라, 섹스심벌 이미지 대신 정숙한 아름다움을 드러낸 마릴린 먼로, 반나체로 아들과 노는 로버트 케네디 등 기존의 연출된 이미지를 벗어 던진 저명인사들의 모습도 이채롭다.

하지만 무엇보다 카르티에-브레송의 이름을 사진사에 뚜렷이 각인시킨 사건은 1947년 보도사진가 집단 ‘매그넘’의 창립일 것이다.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세이무어, 조지 로저, 그리고 카르티에-브레송이 의기투합해 창립한 매그넘은 사진가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주체적 존재로서 자신만의 시각을 담는 사진을 펼칠 수 있게 기여했다.

1948년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의 죽음, 중국 공산당 집권 직전 촬영한 청나라 마지막 환관의 쇠락한 모습, 1960년대 초 베를린 장벽에 매달려 무심코 노는 아이들의 모습 등 인간애를 담은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은 격동의 세월을 견뎌낸 사람들의 이야기로 역사를 증거하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매주 토요일에는 브레송의 작품세계에 대한 특별 세미나(오후 4시)가 열리며, 매주 수요일 ‘사진작가와의 만남’(오후 6시 30분) 시간에는 강용석, 오형근, 김아타, 김중만 등 현역 사진작가와 함께 대담할 수 있다. 입장료는 성인 9000원, 대학생 8000원, 중고생 6000원. 문의전화 02-379-1268.


 


중국 공산당 집권기 직전에 촬영한 청나라 마지막 환관의 모습.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터무니없이 큰 통소매 옷을 입고, 주름진 웃음을 날리는 환관의 모습은 쇠락한 청 왕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자신이 찍은 사진에 일절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오직 촬영한 장소와 연도를 기록했을 뿐이다. 부연설명이 없기에 오히려 관람자 자신의 눈으로 발견한 사진의 미학에 몰두할 수 있는지 모른다. 뼈대만 남은 것처럼 길쭉하고 앙상한 조각상을 즐겨 만들었던 조각가 자코메티의 초상사진이다. 노 조각가의 시선은 오래된 나무 문짝이 견뎌온 세월을 지그시 바라보는 듯하다.

 

소녀의 머리 바로 위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그림자는 관람자의 시선을 급격히 잡아당긴다. 그림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면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이 만들어낸 빛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는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길 위에 네모난 ‘빛의 상자’가 생길 때까지, 또 그 상자 속에 누군가 살포시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 브레송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을까.
[미디어다음/ 2005. 5. 17] 서울 관훈동 대안공간 풀에서는 2005년 기획초대전으로 13일~31일까지 조습(31)의 두 번째 개인전 ‘묻지마’전을 개최한다. 블랙유머가 담긴 연출 사진과 영상작업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꼬집어온 조습은 5·18 민중항쟁을 비롯해 4·19 학생혁명, 5·16 쿠데타, 무장공비 침투 사건, 박종철 물고문 사건, KAL기 폭파사건 등 1945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단면을 기록사진 형식으로 재연한 작품을 선보인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재연한 ‘80년 광주’(2005) 연작. 요즘 젊은이들이나 입을 법한 형광 티셔츠의 설정은, 폭력과 억압의 역사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매개물로 작용한다.

조습은 첫 개인전 ‘나는 명랑을 보았네!’에서 사이비 종교 열풍, 우스꽝스러운 결혼문화, 반공 교육 등을 풍자하며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비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희화화한 작업을 선보인 바 있다. 이번 전시는 기존 작업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이러한 개인이 비주체적 삶을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역사적 사건’에 초점을 맞췄다. 빛바랜 신문 속에, 혹은 역사교과서 속에 묻혀있던 과거는 조습의 연출 사진 속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패러디 사진과 보도 사진의 구도가 혼재된 조습의 사진은 일종의 ‘유사 다큐멘터리’와 같은 외형을 띤다. 작가의 표현을 따르자면 “짬뽕 다큐멘터리”인 이 작품들은 전문 배우들이 고증에 따라 연기하는 드라마 ‘제5공화국’보다, 무명 연기자가 금발 가발을 쓰고 나와 어색한 연기를 펼치는 ‘타임머신’의 재연드라마에 가깝다. 실례로 5·18 민중항쟁, 박정희 전 대통령 피격사건,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을 재연한 일군의 등장인물은 전문 배우가 아니라, 미술가, 회사원, 미술평론가, 학교 선후배 등 작가와 가까운 일반인들이거나 혹은 작가 자신이다.

게다가 촬영 장소 역시 전문 세트장이 아닌 동네 체육관, 대중목욕탕, 학교, 동사무소, 카페와 클럽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공간이다. 예컨대 5·16 쿠데타를 선포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사진은 노래방에서, 질펀한 술자리가 박 전 대통령 피격으로 이어진 10·26 사태는 궁정동 안가가 아닌 갈비집에서 촬영됐으며, 박종철 물고문 사건은 손님들이 때를 밀고 있는(것처럼 연출한) 대중목욕탕에서 천연덕스럽게 재연됐다.

이처럼 비전문 배우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공간, 가짜 피가 뒤범벅된 사진에서 풍기는 ‘연출된 어설픔’은 역사적 사건 속에 담긴 개인성과 일상성을 부각시키는 장치로 작용한다. 빛바랜 역사 속 한 장면으로 사라져간 듯 보이는 사건들이, 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 속에도 견고하게 스며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시각적 장치인 셈이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역사적 퇴행과 강압적인 국가 이데올로기, ‘한국적 헝그리 정신’이 교차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단면은 한편의 씁쓸한 블랙코미디일 수도, 잔혹한 다큐멘터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몇몇 사진에서 유혈 낭자한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 것에 대해 조습은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군인’과 ‘살인’은 빠지지 않는 요소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뒤 “한국의 근대화란 질문도 아니고 답도 아닌 어떤 것”이라며 관람객들도 각자의 시선으로 사진을 바라보며 해석해보기를 당부했다. 관람료 무료, 문의 02-735-4805.

 
5·16 쿠데타를 알리는 살벌한 풍경은 노래방에서 희화화된 장면으로 모사된다. ‘5·16 쿠데다’(2005)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식의 왜곡된 발표로 국민의 분노를 샀으며 이후 의문사 규명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친 박종철 물고문 치사사건을 소재로 삼은 ‘물고문’(2005). 천연덕스럽게 때를 밀고 있는 뒤편 사람들로 인해 단순히 역사 속 폭력이 아닌 일상 속 폭력의 상징성이 강화된다.
 


사건의 진실은 미궁 속으로 사라진 KAL기 폭파사건을 소재로 한 ‘김현희’(2005). 당시 반 북한 정서를 강화시키는 선전 수단이 된 사건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마를린 먼로의 한국 위문공연을 소재로 한 작품. 금발 가발에 여장을 한 작가의 모습은 연출된 재연드라마 같은 형식으로 나타난다.
 


민주화 투쟁 중에 쓰러져 간 시민(‘의문사’, 2005)와 헝그리 정신의 표상처럼 각색된 육상선수(‘임춘애’, 2005)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특히 “간식으로 라면을 먹었다”고 말했다는 임춘애가 어느 순간 “라면만 먹고 뛴 의지의 한국인”으로 오도되는 과정은 한 개인이 ‘한국적 헝그리 정신’의 대표사례로 포장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미군의 이오이 섬 정복 장면을 패러디한 ‘정복’(2005). 한국전쟁을 계기로 부각된, 한반도를 둘러싼 외국 정세의 단면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