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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환생한 장인의 혼-한·중 전통등축제 Oct. 25. 2002 |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등 하나가 홀연히 빛을 발한다. 그 빛에 인도된 사람들이 또 하나의 등을 마음 속에 밝히고, 이 불빛은 다시 수많은 사람의 마음으로 이어지면서 세상의 어둠을 밝히게 된다. 이것이 《유마경》에서 설파하는 무진등(無盡燈)의 이치다. 굳이 불교적 가르침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미혹을 밝히는 한 줄기 등불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연등회가 종교적인 색채와 무관하게 사람들의 눈을 끌어당기는 이유도 화려함과 숙연함이 공존하는 등불의 매력에 있을 것이다. 흔히 등축제라 하면 석가탄신일 같은 특정한 날에나 접할 수 있기 마련이지만, 잊혀져 가는 등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전시 2건이 가을밤을 수놓고 있어 눈길을 끈다. 10월 25일까지 남산예술원에서 열린 전.. 2002. 10. 25.
도처에 떠도는 죽음의 이미지를 까발린다-안창홍 ‘죽음의 컬렉션’전 Oct. 25. 2002 |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단 한 가지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경험으로 알고 있는 이 사실은 종종 부정되곤 한다. 죽음에 대해 언급하기를 터부시하는 것은 일상이 됐고, 심지어는 냉동인간이 되기를 자원하는 등 현대과학의 힘을 빌려 죽음에 거부하기도 한다. 안국동 갤러리사비나에서 11월 10일까지 열리는 서양화가 안창홍의 ‘죽음의 컬렉션’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에게나 털어놓기는 꺼리는 죽음의 이미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채집했다. 안창홍은 학력과 인맥이 작가의 암묵적 요건으로 꼽히는 미술계에서 독학으로 작가가 된 독특한 케이스로, 17차례의 개인전을 치르면서 일상 속의 폭력과 죽음.. 2002. 10. 25.
사물을 보는 다른 방식-‘2002우리들의 눈’전 Oct. 18. 2002 | 시각장애인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사람’을 생각한다. 대중매체에서 묘사되는 시각장애인이나, 비장애인들이 주변에서 마주치는 모습들은 그렇게 관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의 범주는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다. 예컨대 교정시력 0.05 미만으로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는 전맹이지만, 어둠과 밝음만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광각, 눈앞에서 손을 움직일 때 알아볼 수 있으면 수동, 1m 앞에 놓인 사물의 수를 헤아릴 만큼 보이는 상태를 지수라 한다. 볼 수는 있으나 교정시력 0.3 미만으로 보통 크기의 책 글자를 읽을 수 없는 상태는 약시다. 이처럼 세분화된 시각장애의 상태를 인지하고 적절한 시기에 합리적인 감각발달훈련이 이뤄지면, 눈으로는 세세히 .. 2002. 10. 18.
의식의 심층으로 향하는 문과 계단-이명진의 ‘relationship’전 Oct. 18. 2002 | 그림자 사나이 하나가 탈출구를 찾아 달린다. 그의 눈앞에 낯익은 계단이 보인다. 아까부터 계속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맴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달리다가 문을 발견하고 열어보지만, 문 뒤에는 또 다른 문만 보일 뿐 달아날 공간이 없다. 그 문 뒤에는 또 다른 문, ‘이번만은…’ 하며 마지막으로 열어제낀 문 뒤에는 차가운 벽이 절망적으로 그림자의 눈앞을 가로막는다. 10월 26일까지 갤러리보다에서 열리는 이명진의 첫 번째 개인전‘relationship’은 이처럼 거대한 밀실과 승산 없는 싸움을 하는 그림자 사나이를 떠올리게끔 한다. 알록달록한 색채와 앙증맞은 형태로 집을 치장하긴 했지만, 탈출구를 찾아 복도와 계단을 끝없이 헤매는 저 검은 영혼의 이미지는 달콤한 환상을 모조리.. 2002. 10. 18.
웃음 뒤에 찾아오는 페이소스-‘funny sculpture·funny painting’전 Oct. 11. 2002 | 10월 24일까지 평창동 갤러리세줄에서 열리는 ‘funny sculpture·funny painting’전은 박영균(회화), 천성명(조각), 노석미(회화), 홍인숙(판화) 등 30대 초·중반 작가 4명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다. 전시명이 풍기는 이미지는 마냥 가볍고 흥미로운 것 같지만, 막상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하나같이 희화화된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희극무대를 방불케 한다. 손에 봉숭아물을 들이고 배시시 웃는 주책스런‘늙은 언니’, 머리에 꽃을 꽂고 철퍼덕 주저앉은 회사원 아저씨, 실연의 충격으로 가슴에 구멍난 처녀, 아이인지 어른인지 모를 땅딸막한 애늙은이…만화 속에서 방금 뛰어나온 듯 과장되거나 축소된 형태, 화려하고 유치찬란한 키치 이.. 2002. 10. 11.
글씨로 그린 풍경-‘60년대 이응노 추상화, 묵과 색’전 Oct. 11. 2002 | 문자추상과 군중 연작으로 널리 알려진 고암 이응노. 그의 회화를 보면 사람을 닮은 듯, 글자를 닮은 듯 다의적인 형상이 백지 위를 종횡무진 내닫는다. 힘찬 먹선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한껏 뭉쳤다가, 배경색과 먹선이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내는 묵과 색의 한바탕 춤판. 평창동 이응노미술관에서 12월 21일까지 열리는‘60년대 이응노 추상화, 묵과 색’전에서는 고암이 파리체류 초기인 1962∼67년 사이에 제작한 추상화 소품 1백20여 점을 소개한다. 모두 일반인에게는 처음으로 선을 보이는 미공개 작품. 흔히 알려진 고암의 작품은 대작 위주지만, 오랜 시간 다독이듯 쌓아나가는 대작과 달리, 스케치로 일기를 쓰듯 그려진 작품들은 고암의 체취를 보다 극명히 보여준.. 2002. 10. 11.